조선에서 쌀 생산량의 변화가 1910년대에 성장하다가 1920년대 정체하고, 1930년대에 재성장하는 것은 우량품종의 보급 상황으로 설명된다. 1910년대는 조신력에 의해 생산성이 향상되지만, 1920년대에 들어 곡량도가 수위품종이 되며 생산성이 정체된다. 그 후 1930년대에 다시 생산성이 늘어날 수 있었던 원인은 2세대 품종인 은방주의 보급과 연결되어있었다. 추가로, 남한보다 북한의 쌀 생산성 증대 속도가 더 빨랐던 원인은 우량품종 보급의 생산성 증대 효과가 북한 지역이 더 높았던 것이 통계적 분석이 존재한다. 이처럼 남북한의 생산성 증대 속도 비교를 통해서도 우량품종의 보급이 생산성의 변화와 직결되는 것을 알 수 있다.*22)
다만 앞서 1920년대에 곡량도의 보급이 생산성 정체를 가져왔듯이, 우량품종이 보급되는 것이 늘 긍정적 영향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시대별, 지역별로 품종에 따라 효과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1910년대에는 남한 지방의 조신력만이 우량종 보급이 생산성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고 북한 지역의 일출은 유의미한 생산성 증대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반대로 1920년대에는 북한 지방의 구미만이 증대를 가져온다. 즉 우량품종의 확산과 생산성 향상은 음의 관계를 이루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우량품종의 보급이 생산성 증대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경우에서도 구체적인 품종에 따라 그 효과의 크기는 다르게 나타난다. 1930년대에 남한에서는 은방주가, 북한에서는 육우132호가 생산성 향상에 공헌하지만, 그 효과는 육우132호가 2배 정도 높게 나타난다.*23)
정리하자면 우량품종의 보급은 분명히 생산성 증대에 있어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 사했지만 언제나 양의 관계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이는 1920년대의 정체기를 통해서, 그리고 1930년대 이후의 상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930년대에 은방주가 보급되기 전, 1930년대 초반의 장려품종이 쌀 생산성 증대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내지 못한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쌀 우량품종이 오히려 생산량을 절감하기도 했다는 것이다.*24)
이처럼 우량품종의 보급이 생산성에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준 것은 권업모범장의 식민지 본국 중심성에서 야기된 연구 소홀에서 일부 기인한다. 앞장에서 살펴봤듯이 권업모범장은 기본적으로 깊이 있는 연구 없이 일제 농업 기술을 그대로 조선에 도입함으로써 농사개량을 꾀하고 있었다. 앞서 본 조신력에서 곡량도로서의 주력 품종 교체에서도, 둘 사이의 내비성 차이를 충분히 연구하지 못하여 비료가 증대되는 시대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多肥 시대로 넘어옴에 따라, 농민들은 그나마 조신력보다 내비성이 나은 곡량도로 품종을 교체하며 대응하고자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내비성‧내병성을 갖춘 품종으로서의 은방주를 1922년에야 도입하지만, ‘다비 다수확 품종’으로서 장려된 것은 1930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은방주가 장려품종이 되자마자 재배면적이 급격히 늘고 곡량도는 급격히 면적이 줄게 된 것도 곡량도는 당시 농업 현실에 부적합한 품종이었음을 보여준다.*25)
다만 주의할 점은, 이러한 연구에서의 실책을 ‘의도적인 식민지 탄압'의 방향으로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곡량도의 교체로 생산성이 정체된 것은 일본의 의도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일본 농업기술자들이 조신력과 곡량도를 장려품종으로 선정할 당시는 少肥가 일반적이었으므로 내비성을 크게 고려하지 못한 것은 불가피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생산성의 정체라는 결과 자체보다는 그것을 야기한 원인으로서의 ‘일제 농업 기술의 이식되던 형태’의 문제에 주목하고자 한다.
3.2. 전반적인 농사개량에서의 식민 지배 상황의 영향
3.1 단락에서 우량품종의 생산성을 통해 ‘우량품종의 도입’이라는 구체적인 분야 에서 일제와 조선 간 식민지 관계가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봤다면, 아래의 내용은 식민 지배의 상태가 전반적인 농사개량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살펴볼 것이 다. 우량품종의 도입 역시 농사개량 사업의 하나였기에, 둘은 같은 맥락에 있을 수밖 에 없다. 식민지적 특성은 크게 사업의 목표 수립 측면, 그리고 연구 및 기술 도입의 측면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식민지 본국의 사회적 요구에 따라 농업 기술의 시험 연구가 이루어졌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정책의 추진 주체가 처한 사회적 상황이 정책에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 일로서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식민 지배라는 상황에서는 정책 추진 주체 는 일본이지만 추진의 대상은 한국이기에, 그러한 사회적 요구의 반영이 ‘구조적인 지배’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일제 농업기구에서는 일제가 한국 농업을 구조적으로 지배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들을 펼쳐나갔다. 특히 그러한 특징은 1910년대 후반에서 20년대 초의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1917년 여름부터 일본에서 쌀값이 급격히 오르지만 쌀 수확은 감소한다. 1차대전 특수로 인한 인플레이션, 도시노동자의 쌀 소비 증가, 쌀 상인들의 담합과 투기까지 벌어지며 1918년 7월에 쌀 폭동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또한, 이 시기 한국에서는 1919년에 경기도 지역 중심으로 가뭄이 심하여 농민의 구제가 시급해졌다. 이러한 식량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농산물 생산의 증대가 요청되었다. 덧붙여, 1차 세계대전의 총력전 형태를 보며 식량 자급의 중요성을 일본 정책담당자들이 인식했다는 측면도 있었다. 이러한 일제의 필요 하에 산미증식계획이 수립, 전개되어 한국에서의 농사개량은 일제의 농업발달과 식량의 증산에 궁극적으로 목표를 둔 것이다.*26)
둘째로, 일본 환경에 맞추어 식민지 본국에서 축적된 연구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조선의 기술을 경시하고 일본에서 기술을 수입해오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조선에 맞는 기술 개발이 아니라, 일본 농업 기술을 권업모범장에서 시험해본 결과 조선의 상황에도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것을 그대로 이식할 뿐이었다.*27) 이러한 식민지 본국 위주의 조선 농업 개편의 두 가지 특징은, 조선 농업구조의 米單作化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일본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한국의 쌀 증산’에만 초점을 맞추어, 농업기구 내 기술자들은 한국의 벼농사에 적용할 벼 품종, 재배 방법 등에 집중하여 벼농사에 편중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에 비해 밭농사의 발전은 부진했다. 밭농사는 집중적인 육종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고 식민지 초기와 후기를 비교했을 때 일정 면적당 생산량이 증가한 것은 5개 품종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밭작물은 생산량이 정체되거나 오히려 줄어들었다. 일본의 농업기술자들은 주로 벼농사에 전문이었으므로, 조선 밭농사를 잘 알지 못했으며 재래 농법에 대한 무지는 그에 대한 경시로 이어져 벼농사 부분의 지도가 제대 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28) 더불어 건조한 땅에서의 농업 경험이 부족했던 일본 기술자들의 밭농사 기술 개발 능력의 부진이 그대로 조선에까지 이어진 것도 밭작물 생산량 증대 부진의 요인이다.*29)
1910년대 후반 여러 쌀 폭동 등의 식량문제로 인해 식량 위기 극복이 요구될 시기에는 권업모범장 서산지장을 설치하며 밭작물에 관한 관심을 전개해 나가는 식으로 태도가 변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산미증식계획의 실행으로 쌀 생산을 중심으로 하게 되어, 실제 농업 현장에서 식량용 밭작물 장려 정책은 뒤로 밀려났다. 또 일본에서 식량문제가 해결되어 가며, 굳이 밭작물의 증산까지 시행할 필요가 없게 되기도 했다.*30)
이처럼 미단작화의 경향은 식민지 본국인 일본의 목적과 요구에 좌우되며, 일본의 연구 상황을 그대로 이식할 뿐이었던 당시 농사개량 사업을 잘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동안, 가장 넓은 재배면적을 차지하는 우량품종은 시기에 따라 변화한다. 그 변화 양상은 벼 품종의 특성, 그리고 해당 시기의 사회적인 요인들과 얽혀 있으 며, 이를 구체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주요 벼 품종들의 특성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조신력(早神力)은, 권업모범장이 김제군 백가정길전농장에서 얻어서 경기도, 충남, 충북에 많이 보급된 품종이다. 비료가 적은 환경에서도 비교적 많이 생산되는 것이 장점이지만 동시에 비료가 많아지면 도열병에 약해서 전멸하기도 한다. 즉, 비료를 증대하는 경향에서는 재배에 부적합하다. 품질은 중급이었다.
둘째로 곡량도(穀良都)는, 경북에 처음 들어와서 試作하였지만 구체적인 도입 경로는 불확실하다. 해충의 피해에 약하고, 바람과 비에 잘 쓰러진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 대신 척박한 환경에 잘 견딜 수 있었으며 회복성이 강했다. 소량의 비료는 성장을 도왔으나 다량은 거부 반응을 야기했다. 낟알이 커서 품질이 양호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셋째로 다마금(多摩錦)은, 1908년 권업모범장이 試作하고 조선 남부지방에 보급한 품종으로서, 내비성이 약했지만 척박한 토양이나 가뭄에 강했으며 품질이 뛰어났다.
넷째로 은방주(銀坊主)는 1922년에 익산군 오산면의 이식 농가가 원종을 가져와 재배한 것이 시작점이다. 바람과 비에 쓰러지는 것이 적고, 내병성과 내비성이 강했다. 다만 품질과 맛이 낮았다. 그렇지만 중소립형의 낟알이 1930년대의 쌀 시장의 선호와 잘 맞아 선호되었다.
다섯째로 풍옥(豊玉)이 있다. 은방주를 이용하여 개량된 품종으로서 소립종이며, 비료의 양과 성장 속도가 비례했으며 추위에 잘 견뎠다.*10)*11)
이러한 다섯 가지 주요 품종 외에도 북한 지역에 널리 재배되었던 일출(日出), 구미(龜尾)도 재배면적에서 상위 5대 품종을 구성하기도 했다. 이 중 본 글의 논의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것은 조신력, 곡량도, 은방주이다.
2.2. 우량품종 보급 과정의 전개
일제의 벼 종자 보급정책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한말부터 1925년까지를 제1기로 구분하며, 다양했던 재래품종을 소수의 품종으로 바꾸고 생산되는 쌀의 질을 높이는 시기라고 말한다. 1926년 후를 제2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산미증식계획의 실시와 함께 더 저항력 있고 생산성 높은 벼 품종을 추구하는 시기로 변경되었다고도 본다.*12)
조선의 재래품종은 그 특성상 비료가 많고 물이 풍부한 경우에는 일제의 우량품종보다 생산성이 떨어지지만, 추위를 잘 견디는 등 조선 기후에 적합하며 이삭이 빨리 여물며 발아력이 강하다는 장점도 존재했다.*13) 그렇지만 일제는 조선의 재래 벼 품종보다는 일본의 품종으로 한반도 농업의 품종을 통일시키는 사업으로써 우량품종을 키워 보급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농민들은 일본의 품종에 대해 의문을 가졌지만, 일제는 생산성을 길러야 한다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량품종을 장려하며 권업모범 장과 종묘장을 통해 정책을 이어나갔다.*14) 이는 전반적으로 일본 품종이 조선 품종보다 생산성이 높았던 것의 결과이므로 단순한 억압적 농사개량 정책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일 테다. 다만 일제의 목표가 농업 정책의 핵심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 재래 품종의 보존보다는 일제 농업의 이식이 중심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목표의식에 따라 점차 조선 내 재래품종 대신 우량품종을 재배하는 경향이 지배적이게 된다. 전북의 통계를 사례로 보면, 일본 우량품종을 재배하는 비율은 1912년 10.6%에서, 1917년은 60.6%, 1937년에는 88.6%, 1940년에는 96.9%로 크게 증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비해 조선 전통 재래품종은 1912년의 89.4%에서 1940년의 3.1%로 크게 감소하였다. 즉 재래품종이 밀려나고 소수의 품종으로 통일되는 형태로 우량품종이 확산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우량품종별 작부 면적을 비교함으로써 소수 품종으로 통일되는 경향을 전북의 사례를 통하여 살펴보겠다. 전북이 사례로서 적합한 이유는, 우량품종 으로의 벼의 유전적 획일화가 잘 드러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전북에서 우량품종의 재배 비율이 전체 재배의 80%에 달하기까지 걸린 기간 자체가 전체 조선은 20년 정도가 걸렸으나 전북은 그 절반인 10년이 걸릴 만큼, 소수 품종으로의 통일이 선도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처음에는 수위 자리*15)에 고천수(高千穗)가 있었지만 그러한 경향은 길게 가지 못하고 1912년에 조신력이 1위를 차지한다. 1920년에는 곡량도가 1위를 11년간 유지되다가 1931년에 은방주가 10년 이상 1위를 하면서, 전북에서 벼 재배면적의 78%를 하나의 품종이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상위 2~3개의 품종이 우량품종 재배면적의 80%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1930년대 이후부터는 전체 벼 재배면적의 80%를 차지하여 소수 우량품종으로의 통일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6)
2.3. 시기에 따른 수위품종의 교체 요인
조선 전체에서 대표적으로 재배되던 쌀 품종으로 시기 구분을 하면 1910년대는 조신력, 1920-30년대 중반의 곡량도,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은방주로 나누어 볼 수 있 다.*17) 조선 총독부의 <농업통계표>(1940)의 우량품종별 재배면적의 추이 자료를 기준으로 봤을 때, 재배면적에 있어서 1910년대에는 조신력이 1위를 차지하다가 1920년 대에는 곡량도가 1위가 된다. 곡량도는 1920년대 재배면적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1930년 46만 정보로 최고점에 이르지만 이후 은방주가 1위 면적을 차지한다. 참고로 북한 지방도 1910년대의 일출, 1920년대 구미, 1930년대에는 구미에서 다시 육우(陸 羽)132호로의 교체를 확인할 수 있다.*18)
우량품종의 교체는 수위품종*19)의 특성으로 방향성을 대체로 파악할 수 있다. 전북의 사례를 보면, 초기에는 재래품종에 비해 많은 양의 수확이 가능한 조신력이 수위품종 이지만, 비료가 증대가 도열병을 불러오면서 도열병에 약한 조신력은 사라지고 불량 환경에서도 재배하기 쉽고 품질이 강했던 곡량도가 20년대까지 수위품종의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비료사용이 더 증대되면서 곡량도 또한 내비성과 내병성이 약하고 비와 바람에 쉽게 쓰러진다는 단점 등으로 인해 물러난다. 이후 30년대에 들어서는 은방주가 내병성‧내비성*20)을 고루 갖추었으며, 중소립종이기에 쌀 시장의 선호와 맞아서 쌀의 품질 자체는 떨어짐에도 인기를 끌었다.
즉 주력 우량품종의 교체 방향을 보면 내병성과 내비성을 강화하고, 쌀의 품질보다는 생산되는 수량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성숙기가 빠른 품종으로 교체되어왔다. 물론 그럼에도 일정한 양질성, 안정성의 범위 안에는 있는 상태에서 그러한 변화가 일어난다. 전체적으로 보면, 주력 우량품종의 교체는 재배 기술과 일본 쌀 시장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21)
Ⅱ.본론 1. 권업모범장의 성격에 대한 고찰 1.1. 권업모범장 설립에서의 일제의 농업지배 의도 1.2. 권업모범장 사업 전개에서의 식민지 본국 중심성
2. 벼 품종의 변화 양상 2.1 벼 품종별 특성 2.2. 우량품종 보급 과정의 전개
3. 일제의 품종개량 사업의 결과 3.1. 우량품종 보급으로 인한 생산성의 변화 3.2. 전반적인 농사개량에서의 식민 지배 상황의 영향
Ⅲ.결론
Ⅰ.서론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한국 농업을 자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용했다. 이러한 특성은 일본 내 쌀 폭동 등의 사회적 상황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농사개량 사업의 결과 어느 부분 생산량 증대가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토지개량 사업에서의 시비법 발달 등과의 엇박자로 인해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도 했다. 본 글에서는 일제가 조선에 적용한 농업기술체계를 수도우량품종의 도입을 중심으로 알아봄으로써 일제의 조선 농업 정책의 성격을 탐구할 것이다.
이때 그 성격을 ‘추진 주체’와 ‘추진 대상’이 달랐던 식민 지배의 상황이 가져온 영향을 중심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국가의 정책은 추진 주체와 그 대상이 모두 해당 국가로 동일하지만, 이러한 동일성은 ‘식민 지배’라는 특수한 상황에 서 깨지게 된다. 권업모범장을 비롯한 일제의 농업기구 및 구체적인 정책에서 그 추진 주체는 식민지 본국인 일제였고, 추진 대상은 피식민국으로서의 조선이었다. 서술의 편의를 위해 이러한 어긋남을 ‘식민성’으로 표현할 것이지만, 식민성이라는 용어가 식민지적 억압의 의미보다는 타국의 지배를 받는 특수 상황이 초래한 주체-대상 간 어긋남의 의미임을 짚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식민 지배가 가져온 식민지 본국 중심적인 성격에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하되, 지나친 민족주의 담론의 경향에서는 탈피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식민지 본국으로서 일제는 자국의 요구에 맞추어 한국 농업구조를 재편할 필요성을 느끼는데, 이를 위해 추진한 농사개량 사업 중 하나가 벼의 우량품종 도입이다. ‘우량 품종’이란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재배해온 재래품종과 달리, 일본에서 試作 후 우수한 결과를 내는 품종을 골라 들여온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량품종의 도입은 앞서 언급했듯이 비료 증대 경향과 어긋나게 전개되어 오히려 생산성 정체를 초래하는 등, 일제의 목표 달성에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양상을 탐구하기 위해 우선 일제가 농업 정책을 기획하던 기구인 권업모범장의 기능을 중심으로 벼 품종의 도입이 이루어진 방식을 알아볼 것이다. 농사개량의 시험‧연구를 주도하던 권업모범장의 설립 및 운영에서의 성격은, 구체적인 사업의 성격에도 그대로 반영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우량품종 도입의 전개 양상과 그 요인, 그리고 전반적인 농사개량의 성격 측면에서도 일본과 조선 간 관계가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Ⅱ.본론
1. 권업모범장의 성격에 대한 고찰
1.1. 권업모범장 설립에서의 일제의 농업지배 의도
권업모범장은 조선 농업 정책의 기획과 농업 기술의 보급을 이끌고 나가는 역할을 수행한 기관이다. 식민지기 이전인 1906년 4월부터 통감부가 주도하여 창설되었고 식민지기에는 조선 총독부 산하로 들어간다. 이를 통해 당시 식민지 본국이던 일제의 농업 기술 체계를 식민지 조선에 들여옴으로써, 전통적인 조선의 농업 기술은 상실시키고 농업을 일본의 기술적인 지배 아래에 놓아서 식민 농업화하려는 태도가 보인다.*1) ‘권업모범장’이라는 명칭 자체도 조선 재래 농법에 기반을 두고 근대적인 농법을 ‘시험‧연구’하려는 것이 아닌, 일본의 근대화된 농법을 조선에 ‘모범으로서 권하려는’ 취지가 드러난다.*2)
또 권업모범장의 설립은 한국 농상공부의 농사시험장 설립 계획을 막고 설치한 것인데, 이는 1906년 4월 9일 개최되었던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제3회 협의회>에서 ‘(일본 정부는)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할 예정이다.’라며, ‘그런데 한국에 있어서도 동일의 계획이 있고 …(중략)… 일본 정부로 하여금 모범장을 설립하게 하고 명년도에 이르러 그것을 모두 한국 정부에 인도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묻는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정부에서 농사시험장 설립 시 농업 전반에서 전통적인 기술 체계를 바탕으로 농업에 대한 한국의 지배력이 강화될 것이었다. 따라서 일 본의 의도대로 조선을 식량 공급 기지화하는 것에 방해가 될 터이므로 농사시험장의 설립을 막았던 것이다.*3) 이에 대해 권업모범장의 개설을 한말 정부의 계획, 재원으로 이뤄졌으므로 한말 정부가 개설 주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는 점을 밝힌다.*4) 설령 그 렇다 하더라도 이후 권업모범장이 일제가 조선 농업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데에 이용되었다는 점은 여전하다.
권업모범장은 1906년 11월, 고종의 강한 요구로 한국 정부에 이양되었고 편제가 더 확대되었지만, 기존의 경영 방침을 변경하지 않는 조건이 붙어있을뿐더러 場長을 비롯한 주요 구성원은 거의 일본인들이었다. 즉 일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운영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경술국치 이후 권업모범장 등은 총독부 관할로 들어가며 식민지체제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기구들을 통해 일제는 최소의 비용을 투자해서 쌀의 생산량을 늘리고, 쌀의 품질을 향상하고자 했다. 따라서 권업모범장 및 종묘장 등의 기구를 통해서 일본의 농업 기술을 강제적으로 한국에 이식하는 방식을 통해 농업 기술의 개량을 꾀했다.*5)
1.2. 권업모범장 사업 전개에서의 식민지 본국 중심성
일제가 처음 권업모범장을 설치할 때의 목적은 크게, 시험‧조사 사업, 품종의 육성 배부, 지도‧장려 사업이 있었다. 이러한 사업들은 조선의 기후, 풍토, 농업사회 등의 요소에 관한 연구 없이 일본 농업 기술을 이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시험‧조사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펼쳤지만, 후에 비판을 거쳐 대폭 개편되기 이전까지 실질적으로 연구기관으로서의 성격은 갖추지 못했다. 1910년대의 초기 권업모범장은 품종 개량에 있어서 실질적인 연구보다도 장려와 지도 사업에만 치중했었다.*6)
권업모범장에서는 일본에서 이미 개발된 종자를 도입하여, 그 가운데에 한반도의 풍토에 적합한 것을 골라내는 식으로 신품종 도입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보급된 품종들 을 ‘우량품종’이라 한다.*7) 1912년 12월에 농업기술관회동에서 발표한 「미작에 관한 건」에서는, “우량품종의 보급에 시험을 거쳐 조선풍토에 적응된 품종을 보급하는 것이 1910년대 조선의 농업개량에 핵심임을 설명하고, 이어서 이러한 사명을 담당할 기관으로 권업모범장을 지적”한다.*8)
다만 일제 식민 지배 초기에는 아직 체계가 완전히 잡히지 않은 시험과 조사 작업이 이루어졌다면, 1914년 권업모범장의 대폭적인 개편 이후, 1910년대 중반 이후로는 더 체계화된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를 통해 1915년부터 정규 육종 사업을 시행하는 등, 식민지 조선에서의 농업 수탈을 위한 기반을 만들어 갔다.
그리고 1918년 8월, 일본 내 쌀값의 폭등과 쌀 매점매석에 대한 소문 등이 원인이 되어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시행되는 적극적인 농업 정책이 1920년의 조선산미증식계획이다. 1919년, 관제를 다시 제정하여 지방의 농사 개선 촉진, 우량품종의 보급 등에 도종묘장과 권업모범장이 중요한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적어도 1920년대 초반까지는 권업모범장의 본질은 최소의 비용으로 농사개량을 하는 방안으로서 일본의 선진 농업 기술을 그대로 도입하려는 것에 있었다. 그 후 1차 산미증식계획이 부진하게 끝나면서 일제는 우량품종의 육성과 같은 농사개량을 통해 쌀의 생산성을 향상하고자 권업모범장의 연구기관적인 성격을 더욱 강조한다.*9) 조선의 필요보다는 식민지 본국으로서의 일본의 필요에 맞게 변화되어 가는 모습이다.
주)
1) 김도형, 「勸業模範場의 식민지 농업지배」, 한국근현대사연구3, 한국근현대사학회, 1995, 141면.
2) 류정선, 「조선총독부의 밭작물 개량증식 정책」,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2,14면.
3) 김영진‧김상겸, 「한국 농사시험연구의 역사적 고찰 -권업모범장을 중심으로-」, 농업사연구9-1, 한국 농업사학회, 2010, 14면.
고등학생 때까지 배우는 교과서의 지나치게 '국뽕' 느낌나는 서술은 탈피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식민지 근대화론 쪽으로 향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한 글입니다. 부제의 단어 선택에서부터 느껴지지 않나요 ㅋㅋ..... 그래서 결과적으로 중립적 태도 유지에 성공적이었는지 어떤지는...잘 모르겠군요
-구매 이유 : 이것도 지난번 충청 세션 IPA를 산 이유와 같다. CU에서 로컬 맥주 브루어리들과 협업하여 신제품을 출시했는데, 마침 네캔 구매시 천원 캐시백 행사 중이었고... 신제품 맥주는 너무 이상한 종류만 아니면 도전해보는 것이 취미라서... 샀다.
-구매 후기 :
스퀴즈브루어리..면 말표 맥주에 써있던 '스퀴즈 크래프트 비어'와 같은 곳일 듯해서 기대반 걱정반이었다. 나는 스타우트 종류가 취향이 아니라 말표 맥주도 별로였지만, 흑맥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말표 맥주를 나름 호평하던 걸로 봐서 괜찮은 브루어리 같긴 한데.. 이번에도 '내 취향'에 안 맞으면 어쩌나.. 했다.
근데 뭐 주종이 흑맥주가 아니라서 그런지..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역시나 나는 IPA가 좋다.. 에일도 물론 맛있긴 하지만 IPA 특유의 쓴맛과 향긋함이 그리웠다. 그냥 에일은 뭔가 애매하게 느껴져서 이럴 거면 차라리 아예 꿀꺽꿀꺽 마시기 좋은 라거류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특별히 모난 곳 없는 괜찮은 맥주. 충청 세션 IPA보다 좋았던 점 하나는, 둘다 비슷하게 기울여서 따랐는데도 충청 맥주에 비해 강원 에일이 훨씬 더 거품이 몽글 쫀쫀 폭신하게 나왔다는 것이다.
-구매 이유 : 충청, 전라, 강원, 서울의 지역 브루어리들에서 만든 맥주들이 동네 CU에 새로 들어왔길래 사보았다. 사실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 싶던 참이었는데, 새로 나오는 맥주들이 다 너무 이상하게 생긴 것밖에 없어서... 선택권이 별로 없었다(2080치약 콜라보 맥주 같은 건.. 먹고 싶지 않아!!!). 마침 그렇게 네 개를 국민은행 카드로 사면 1000원 캐시백해주는 이벤트도 하고 있어서 더 좋았다. 게다가 편의점 캔맥주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게 덕덕구스 세션 IPA이므로 같은 세션 IPA 종류인 충청 맥주가 궁금했다.
-구매 후기 : 딱 내가 예상하던 세션 IPA의 맛이라서 좋았다! 라거와는 다른 향긋함이 있지만 지나치지 않다. 이상한 향수 같은 향이 아니라,, 그 뭐라하지 적당히 시트러스 느낌나는 향이라서 낯설지 않다. 에델바이스처럼 민트나 고수를 넣은 맥주 특유의 화~한 맛도 나지 않아서 좋다. IPA 특유의 쌉싸름함은 존재하지만, 세션 IPA 이기에 그 쌉싸름함의 정도가 그리 쎼지 않다. 그런 적당한 향긋함 덕분에 맥주의 알코올맛도 가려진다.
역시 나는 세션 IPA 취향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은 맥주.
다만 별도로 구매할 경우 덕덕구스 세션 ipa는 3000원이고 충청 세션 ipa는 3500원이라.. 덕덕구스를 살 것 같다. 500원 소중해
-구매 이유 : 라식한 지 일주일 되어서 과음은 안되고 간단한 음주만 되는 상태였는데, '간단한 음주'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어서 그냥 안전하게 무알콜로 사봄. 요즘엔 무알콜도 잘 나온다고 들어서 궁금하기도 했고, 가격도 330ml에 1000원이라서 도전해보기에 만만했다.
-구매 후기 : 완전 노맛까진 아닌데.... 뭔가 묘하다. 뭔가... 맛없는 쓴맛..? 물론 맥주도 쓴맛은 나지만 그것보다 인위적인 쓴맛......? 하여튼 평소에 마시던 맥주랑은 뭔가... 달랐다.. 묘하게 구수한 맛이 맥주의 구수함이 아니라.. 다른 음료의 구수한 맛 같았다.
근데 이게 또 내가 '무알콜 맥주는 인위적인 맛을 낸다'라는 편견을 이미 가진 상태였어서 맛도 그렇게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 리뷰할 카스 무알콜보다는 확실히 괜찮긴 했다 ^^ 적어도 일반 맥주에 비해 이상한 향신료가 더 들어간 맛이라거나 너무 지나치게 향긋해서 향수맛 같다거나 하진 않았다. 맥주의 기본적인 맛은 유지하되 그 성질이... 일반적 맥주와는 조금 다른 정도...?
Wuhwang-Cheongsimwon(牛黃淸心丸) is a Korean ‘Yak’ made of about 30 medicinal ingredients, including Wuhwang(a lump in a cow’s gallbladder caused by illness.) and ginseng, used for paralysis, epilepsy and convulsion.*1) 'Cheongsim(淸 心)' implies it is effective in lowering the heat in the heart and liver. The most common name is ‘Cheongsimhwan’ but to be exact, WuHuang-cheongsim‘hwan’ is an Chinese medicine while Wuhwang-chengsim‘won’ is Korean medicine, since the name was used in <Donguibogam>. The manufacturing methods of the two are also slightly different.
Wuhwang-Cheongsimwon is commonly used as a tranquilizer for tense moments such as important exams and interviews. Obtaining it is easy because it is an over-the-counter drug. According to the ‘IMS General Drug Sales Statistics’ from 2012 to 2016, sales of Wuhwang-Cheongsimwon ranked fourth in the overall general medicine market in 2016, showing a trend of growth every year.*2)
However, Cheongsimwon did not start out as such a medicine. The package box states that it is effective for disease such as high blood pressure, speech disorder, facial nerve paralysis, mental anxiety, nervousness et cetera. In other words, it cannot be regarded just as a simple tranquilizer. This can be a problem because even though Korean traditional Yak is from natural sources, it might be harmful to the body if taken incorrectly. Still, Cheongshimwon is perceived to be easier to access than the Western neurostabilizing drugs. This essay will examine how Cheongsimwon got such popularity in modern society.
In order to figure this out, we should first look at the characteristics of Cheongsimwon. We can learn perception of Cheongsimhwan in the past by looking at historical records. It was first recorded in <TaepyeongHyeMin Hwajegukbang> (1107), in which it is called as ‘WuHwang-chengsimwon’ or ‘Gukbang WuHwang-cheongsimwon’. It is said to treat symptoms such as ‘pung(風)’, stammering, heart-pounding, dizziness, sputum, and difficulty in controlling emotions. Cheongsimhwan's prescriptions are also recorded in books such as <Bojebonsabang> written by HeoSookmi in the mid-12th century Song Dynasty, <Dangyesimbup buyeo> published by BangGwang in 1536, and Gogumuigam published by GongSin during the Ming Dynasty. In <Bojebonsabang>, Cheongsimhwan is said to treat the heat in the chest caused by heat in the meridianm and is also used in treating thirst and nausea due to lingering fever. <Dangyesimbup>(1481) states that it has the effect of treating boils and sharp pains in the body. In the Ming Dynasty's <Dujin Seuisimbeop>, it says that Cheonsimhwan is also called as ‘Minssi-Wuhwang-hwan’ and it treats the heat of the heart and the confusion of the mind.
Later, Cheongsimhwan was introduced to Joseon and was accepted by medical books at that time, such as <Uibangyuchui>(1445), <Uirimchwalyo>(1635), <Donguibogam>(1610), <Unhaenapyak jungchibang>(1608), <Jejungshinpyeon>(1799), <Bangyakhappyeon>(1884). <Uirimchwalyo> cites <Dangyesimbup buyeo> and < Donguibogam> cites <Bojebonsabang> and <Gogumuigam> to explain Cheongsimhwan. In Donguibogam it is recorded in the "Pung" chapter and is said to be used when one becomes suddenly unconscious or mentally disturbed after a stroke. In Yi Jemma's <Donguisusaebowon>(1894), Cheongsimwon is said to treat ‘Taeeumin’ types who has severe phlegm, mental depression, and inability to keep his arms and legs properly.*3) According to Joseon dynasty’s sillok, in King Jungjong’s period, Cheongsiwon was regarded as a cure for seasonal epidemics.*4) In King Seonjo’s period, it was given to a person who had heart-throbbing, fever, and seizure.*5) There are many more articles on taking, or giving Cheongsimhwan in <TaejoSilok>, <YeongjoSilok>, <JeongjoSilok>, <GojongSilok>, <Ilseonglok>, and <SeungjeongwonIlgi>.*6)
The above documents show that Cheongsimhwan was widely used in Joseon. Traditionally, Cheongsimhwan was often used in situations of severe mental excitement, seizures, or paralysis, rather than general relaxationer of tension like nowadays. In other words, there had been a change in perception in terms of usage. What process did Cheongsimhwan go through for this change, and what was the cause?
First of all, we need to find out how general Korean Yak was incorporated into modern society. Korean medicine co-existed along with Western medicine, and this served as a background for Korean Yak to be widely spread afterwards. Then the pre-modern characteristics of Cheongsimwon had to be demolished, unless Cheongsimwon would not have fit as a ‘pharmaceutical’ in modern day’s strict regulations, but such issues were solved gradually. For example, since herbal medicines use natural plant products, securing uniformity of quality was a big problem. This was solved by having a regulated company prepare and distribute standardized and quality herbal medicines since May 1995. Also, Hanbang has been included in the National Medical Insurance since 1987, which means Hanuihak prescriptions using herb-extracts were also covered by the national insurance.7) Korean Yak and Hanbang got recognition by the government and were supported for active us, and the quality of the medicine was also managed.
Now the remaining question is, how did ‘Cheongshimwon’ become so popular among many other herbal medicines? Here's how it came to be sold as a modern pharmaceutical product. In 1925, Park Seongsu, who was a Hanuhak practitioner, founded the ‘Joseon Muyak’ company and in 1968, they started making ‘solpyo Wuhwang-Cheongsimwon’, the first commony-used Cheongsimwon. After that Cheongsimwon has been produced by various companies*8) The public became more interested in Cheongsimhwan as various companies came into market, and the market become bigger due to the people's interest in Cheongsimwon, like a reciprocal chain effect.
We can also focus on Cheongsimwon’s status before times of modernization. Park Jiwon’s YeolhaIlgi(1780) reveals the Qing Dynasty people's obsession on Cheongsimwon. As fake or low-grade Cheongsimhwan prevailed in China, real Cheongsimhwan was in short supply.*9) It was so popular in China that even unrealistic rumors about Cheongsimhwan’s magical powers spread throughout the country. Thus, when ambassadors came from Joseon, many Chinese approached to acquire Cheongsimwon. In <YeolhaIlgi>, Park Ji-won being deceived by an elderly Chinese woman and giving her Cheongsimwon.*10) This high status of Cheongsimwon may have contributed to it’s popularity in modern times. However, since 18th century is too far away from today, we cannot be sure if it has any meaningful correlation. In addition, since it is about China not Joseon, it may be inappropriate to explain the current popularization of Cheongsimwon in Korea. But still, we can at least treat this story as an indirect cause.
Next, let's look at the characteristics of modern society and it’s impact on Cheongsimwon. First, changes in materials have occurred, making Cheongsimwon safer and more ethical. The number of ingredients of vary in different books, but the key ingredient is Wuhwang and musk.*11) Because musk sparked controversy over animal rights, a substitute for musk called L-muscon is also used widely nowadays. Seogack(rhino’s horn) is also an important ingredient, but was banned by the World Organization for Animal Health. Therefore Buffalo horns are used these days. In addition, heavy metals such as Jusa and Seokhwang were also used, but because they contain mercury and arsenic, they aren’t used in medicine anymore.*12)
Secondly, the differences in materials lowered the preciousness of Cheongsimhwon. In 1762, when Jeongjo was sick, royal doctor BangTaeyeo made Cheongsimhwon for him. When King Yeongjo heard this he ordered to cut off Bang’s head. Luckily BangTaeyeo got help and saved his life, but this story shows that Cheongsimhwan was an strictly controlled drug.*13) But now the situation is very different from that of King Yeongjo. Combined with the nationalization of Korean Yak, the modern substitutes of materials made it possible to supply Cheongsimhwan at a lower price. The price is formed between 2,000won and 10000won depending on the pharmaceutical company and the quantity of Wuhwang.
Thirdly, the marketing&sales strategy is also noteworthy. The original Wuhwang-Cheongsimwon was sold as an spherical shaped pill, 2~3cm in diameter. It had to be chewed to swallow so the taste and the smell was strong, causing young people to dislike it. However, Kwangdong Pharmaceutical company entered the Cheongsimwon business in 1974 and released the ‘Wuhwang-Cheongsimwon suspension(form of liquid)’ in 1991, making it act fast and easy to drink. This caused young people to more willingly try Cheongsimwon. The fact that Kwangdong Pharmaceutical Co. was able to take over the Solpyo brand of Joseon Muyak also seems to be a positive result of Kwangdong Pharmaceutical’s marketing&sales strategy.*14)
To sum up, as seen in many historical records, the usage and recognition of Cheongsimwon was quite different from today's tranquilizer purpose. Cheongsimwon in the past had different uses, such as being used as a counter-measure for stroke or paralysis, and it was considered important and rare. In the Qing Dynasty, Cheongsimwon of Joseon was so popular that the ambassadors of Joseon took a few pills of Cheongsimwon with them. Due to this popularity, Cheongsimwon managed to maintain it’s position as a major Korean Yak. The fact that Cheongsimwon appeared in various royal history records shows the high status of Cheongsimwon.
In that way Cheongsimwon consolidated it’s position in the pre-modern era. In the modern age, Cheongsimwon became popularized by changed characteristics. First of all, materials such as musk have been replaced with safer and more ethical materials. This caused the price to be lower, only 2,000 to 10,000won, making it easy for anyone to get it. Also, the release of liquid-type drugs made it easier for young people to access Cheongsimwon. The fact that it treats serious diseases such as seizure, but is also cheap and convenient to drink, may have led to the expectation that Cheongsimhwan is an "neurostabilizer" that anyone can easily purchase and use.
As such, Cheongsimwon was able to make appropriate changes to adapt to modern times and the source of this change was in both the historical characteristics of Cheongsimhwan and the comprehensive social aspects of modern times.
annotation)
1)『표준국어대사전』 ‘우황청심원’
2)오영택‧오현묵‧김서우‧김원용‧손창규‧조정효, 「우황청심원의 고문헌기록 및 실험적 연구결과 분석을 통 한 임상응용 확대의 필요성 고찰」, 惠和醫學26.1, 대전대학교 한의학연구소, 2017, p.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