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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수도우량품종 보급 사업의 성격

: 사업 추진 주체와 추진 대상의 비동일성의 영향을 중심으로

 

 

-목차-

Ⅰ.서론

Ⅱ.본론
 1. 권업모범장의 성격에 대한 고찰
  1.1. 권업모범장 설립에서의 일제의 농업지배 의도
  1.2. 권업모범장 사업 전개에서의 식민지 본국 중심성

 2. 벼 품종의 변화 양상
  2.1 벼 품종별 특성
  2.2. 우량품종 보급 과정의 전개

 3. 일제의 품종개량 사업의 결과
  3.1. 우량품종 보급으로 인한 생산성의 변화
  3.2. 전반적인 농사개량에서의 식민 지배 상황의 영향

Ⅲ.결론

 

Ⅰ.서론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한국 농업을 자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용했다. 이러한 특성은 일본 내 쌀 폭동 등의 사회적 상황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농사개량 사업의 결과 어느 부분 생산량 증대가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토지개량 사업에서의 시비법 발달 등과의 엇박자로 인해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도 했다. 본 글에서는 일제가 조선에 적용한 농업기술체계를 수도우량품종의 도입을 중심으로 알아봄으로써 일제의 조선 농업 정책의 성격을 탐구할 것이다.

 

이때 그 성격을 ‘추진 주체’와 ‘추진 대상’이 달랐던 식민 지배의 상황이 가져온 영향을 중심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국가의 정책은 추진 주체와 그 대상이 모두 해당 국가로 동일하지만, 이러한 동일성은 ‘식민 지배’라는 특수한 상황에 서 깨지게 된다. 권업모범장을 비롯한 일제의 농업기구 및 구체적인 정책에서 그 추진 주체는 식민지 본국인 일제였고, 추진 대상은 피식민국으로서의 조선이었다. 서술의 편의를 위해 이러한 어긋남을 ‘식민성’으로 표현할 것이지만, 식민성이라는 용어가 식민지적 억압의 의미보다는 타국의 지배를 받는 특수 상황이 초래한 주체-대상 간 어긋남의 의미임을 짚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식민 지배가 가져온 식민지 본국 중심적인 성격에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하되, 지나친 민족주의 담론의 경향에서는 탈피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식민지 본국으로서 일제는 자국의 요구에 맞추어 한국 농업구조를 재편할 필요성을 느끼는데, 이를 위해 추진한 농사개량 사업 중 하나가 벼의 우량품종 도입이다. ‘우량 품종’이란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재배해온 재래품종과 달리, 일본에서 試作 후 우수한 결과를 내는 품종을 골라 들여온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량품종의 도입은 앞서 언급했듯이 비료 증대 경향과 어긋나게 전개되어 오히려 생산성 정체를 초래하는 등, 일제의 목표 달성에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양상을 탐구하기 위해 우선 일제가 농업 정책을 기획하던 기구인 권업모범장의 기능을 중심으로 벼 품종의 도입이 이루어진 방식을 알아볼 것이다. 농사개량의 시험‧연구를 주도하던 권업모범장의 설립 및 운영에서의 성격은, 구체적인 사업의 성격에도 그대로 반영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우량품종 도입의 전개 양상과 그 요인, 그리고 전반적인 농사개량의 성격 측면에서도 일본과 조선 간 관계가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Ⅱ.본론

 1. 권업모범장의 성격에 대한 고찰

  1.1. 권업모범장 설립에서의 일제의 농업지배 의도

 

권업모범장은 조선 농업 정책의 기획과 농업 기술의 보급을 이끌고 나가는 역할을 수행한 기관이다. 식민지기 이전인 1906년 4월부터 통감부가 주도하여 창설되었고 식민지기에는 조선 총독부 산하로 들어간다. 이를 통해 당시 식민지 본국이던 일제의 농업 기술 체계를 식민지 조선에 들여옴으로써, 전통적인 조선의 농업 기술은 상실시키고 농업을 일본의 기술적인 지배 아래에 놓아서 식민 농업화하려는 태도가 보인다.*1) ‘권업모범장’이라는 명칭 자체도 조선 재래 농법에 기반을 두고 근대적인 농법을 ‘시험‧연구’하려는 것이 아닌, 일본의 근대화된 농법을 조선에 ‘모범으로서 권하려는’ 취지가 드러난다.*2)

 

또 권업모범장의 설립은 한국 농상공부의 농사시험장 설립 계획을 막고 설치한 것인데, 이는 1906년 4월 9일 개최되었던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제3회 협의회>에서 ‘(일본 정부는)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할 예정이다.’라며, ‘그런데 한국에 있어서도 동일의 계획이 있고 …(중략)… 일본 정부로 하여금 모범장을 설립하게 하고 명년도에 이르러 그것을 모두 한국 정부에 인도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묻는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정부에서 농사시험장 설립 시 농업 전반에서 전통적인 기술 체계를 바탕으로 농업에 대한 한국의 지배력이 강화될 것이었다. 따라서 일 본의 의도대로 조선을 식량 공급 기지화하는 것에 방해가 될 터이므로 농사시험장의 설립을 막았던 것이다.*3) 이에 대해 권업모범장의 개설을 한말 정부의 계획, 재원으로 이뤄졌으므로 한말 정부가 개설 주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는 점을 밝힌다.*4) 설령 그 렇다 하더라도 이후 권업모범장이 일제가 조선 농업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데에 이용되었다는 점은 여전하다.

 

권업모범장은 1906년 11월, 고종의 강한 요구로 한국 정부에 이양되었고 편제가 더 확대되었지만, 기존의 경영 방침을 변경하지 않는 조건이 붙어있을뿐더러 場長을 비롯한 주요 구성원은 거의 일본인들이었다. 즉 일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운영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경술국치 이후 권업모범장 등은 총독부 관할로 들어가며 식민지체제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기구들을 통해 일제는 최소의 비용을 투자해서 쌀의 생산량을 늘리고, 쌀의 품질을 향상하고자 했다. 따라서 권업모범장 및 종묘장 등의 기구를 통해서 일본의 농업 기술을 강제적으로 한국에 이식하는 방식을 통해 농업 기술의 개량을 꾀했다.*5)

 

1.2. 권업모범장 사업 전개에서의 식민지 본국 중심성

 

일제가 처음 권업모범장을 설치할 때의 목적은 크게, 시험‧조사 사업, 품종의 육성 배부, 지도‧장려 사업이 있었다. 이러한 사업들은 조선의 기후, 풍토, 농업사회 등의 요소에 관한 연구 없이 일본 농업 기술을 이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시험‧조사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펼쳤지만, 후에 비판을 거쳐 대폭 개편되기 이전까지 실질적으로 연구기관으로서의 성격은 갖추지 못했다. 1910년대의 초기 권업모범장은 품종 개량에 있어서 실질적인 연구보다도 장려와 지도 사업에만 치중했었다.*6)

 

권업모범장에서는 일본에서 이미 개발된 종자를 도입하여, 그 가운데에 한반도의 풍토에 적합한 것을 골라내는 식으로 신품종 도입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보급된 품종들 을 ‘우량품종’이라 한다.*7) 1912년 12월에 농업기술관회동에서 발표한 「미작에 관한 건」에서는, “우량품종의 보급에 시험을 거쳐 조선풍토에 적응된 품종을 보급하는 것이 1910년대 조선의 농업개량에 핵심임을 설명하고, 이어서 이러한 사명을 담당할 기관으로 권업모범장을 지적”한다.*8)

 

다만 일제 식민 지배 초기에는 아직 체계가 완전히 잡히지 않은 시험과 조사 작업이 이루어졌다면, 1914년 권업모범장의 대폭적인 개편 이후, 1910년대 중반 이후로는 더 체계화된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를 통해 1915년부터 정규 육종 사업을 시행하는 등, 식민지 조선에서의 농업 수탈을 위한 기반을 만들어 갔다.

 

그리고 1918년 8월, 일본 내 쌀값의 폭등과 쌀 매점매석에 대한 소문 등이 원인이 되어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시행되는 적극적인 농업 정책이 1920년의 조선산미증식계획이다. 1919년, 관제를 다시 제정하여 지방의 농사 개선 촉진, 우량품종의 보급 등에 도종묘장과 권업모범장이 중요한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적어도 1920년대 초반까지는 권업모범장의 본질은 최소의 비용으로 농사개량을 하는 방안으로서 일본의 선진 농업 기술을 그대로 도입하려는 것에 있었다. 그 후 1차 산미증식계획이 부진하게 끝나면서 일제는 우량품종의 육성과 같은 농사개량을 통해 쌀의 생산성을 향상하고자 권업모범장의 연구기관적인 성격을 더욱 강조한다.*9) 조선의 필요보다는 식민지 본국으로서의 일본의 필요에 맞게 변화되어 가는 모습이다.


주)

1) 김도형, 「勸業模範場의 식민지 농업지배」, 한국근현대사연구3, 한국근현대사학회, 1995, 141면.

2) 류정선, 「조선총독부의 밭작물 개량증식 정책」,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2,14면.

3) 김영진‧김상겸, 「한국 농사시험연구의 역사적 고찰 -권업모범장을 중심으로-」, 농업사연구9-1, 한국 농업사학회, 2010, 14면.

4) 김영진‧김상겸, 위의 글, 29면.

5) 김도형(1995), 위의 글, 149-153면.

6) 김도형(1995), 위의 글 175-178면.

7) 홍금수, 「일제시대 신품종 벼의 도입과 보급」, 대한지리학회지 38-1, 대한지리학회, 2003, 74면.

8) 김도형(1995), 위의 글, 165면.

9) 김도형(1995), 위의 글 168-172면.


고등학생 때까지 배우는 교과서의 지나치게 '국뽕' 느낌나는 서술은 탈피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식민지 근대화론 쪽으로 향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한 글입니다. 부제의 단어 선택에서부터 느껴지지 않나요 ㅋㅋ..... 그래서 결과적으로 중립적 태도 유지에 성공적이었는지 어떤지는...잘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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