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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우리는 보편성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편의 또 다른 이름이 특권이라는 사실도 잊는다.(9p)’

당연스레 전제되는 기준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겪는 어려움이 얼마나 많은가. 보편성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성소수자들은 매일같이 자신의 이질적 특성을 더욱 실감하며 ‘평범’한 척 행세해야만 한다. 그리고 상하관계가 뚜렷한 공식적 공간인 일터에서 성별에 따른 일정한 역할 행동이 기대될 때 그러한 이질적 정체성은 또다른 어려움을 가져온다.

자신을 ‘기록노동자’라고 인식하는 저자 희정은, 우리 사회의 노동과 성소수자라는 특성이 접하는 순간들을 취재하여 르포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를 완성했다. 그가 인터뷰한 익명의 소수자들은 취업 과정 및 직장에서 겪은 미묘한 괴리감을 털어놓는다. 담담한 어투로 약자의 설움을 대리하는 문장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일상 속 타자화를 짚어낸다.

다만 이 책은 단순히 퀴어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일반 노동자’와 ‘이반 노동자’가 겪는 난관이 다르면서도 또 어떻게 ‘같은지’를 써내려한다. 지배적 존재에 의한 억압을 다루지만, 결국 너와 나 모두 사회라는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일깨우며 ‘구분짓기’를 멈추려 노력한다. 이러한 ‘구분짓기’의 중단은 퀴어에 대한 이해의 호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태도이다. 이해라는 단어는 포용처럼 보이지만 타 존재의 정립이 내 인정과 수용에 기반함을 전제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이해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해는 뜨고 진다. 마찬가지로 ‘여자인 네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이해해’라는 말도 필요치 않을 때, 즉 이해를 위한 능동적 노력의 필요성도 사라질 때, 보편성의 범위는 끝없이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나’를 ‘나’로 드러내도 괜찮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때가 오면 우리는 비로소 모두가 함께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을 테다.


교내 다양성위원회 도서 추천사 공모전에 제출했던 짧은 글입니다. 나름.. 5등 안에 들어서 에어팟을 받은 글!

이제 응모 및 평가 기간이 모두 끝났으므로 티스토리에 올려봅니다.

지금보니 작은따옴표를 너무 자주 사용한 듯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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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프로이트, <꿈의 해석>, 김인순 역, 열린책들, 2020

 

-들어가는 말 :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인식(어쩌면 다소 뻔한 이야기)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정체성이, 섣불리 알 수 있다고 말해도 되는 영역의 것일까? 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먼저 우리가 타인과 자신을 향해 어떤 모순적인 태도를 지니는지를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쉽게 타인을 정의 내리곤 한다. ‘저 사람은 냉정해’, ‘그 친구는 소심하지만 착해’ 같은 선언이 그 사례이다. 하지만 정작 다른 사람이 자신을 그런 식으로 정의 내리면, 변명의 말로 대응하려 한다. 자신은 그렇게 단순한 몇 마디 말로 표현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남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남들은 우리를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 스스로가 ‘아주 많은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남들은 알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면적인 나'에 대한 모순적 인식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의 不定성과 다면성은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그렇듯 다면성을 인식하면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나름대로 정의내리려고 한다. ‘나는 이럴 때는 섬세하지만 또 저럴 때는 거침없는 면모도 있어’와 같은 표현을 떠올릴 수 있다. 남이 나를 평가할 때는 나의 다면성을 강조해서 그 평가를 부인하면서, 나 스스로가 나를 평가할 때는 다면성을 충분히 반영한 평가인 듯이 포장하며, 다면성을 파악 가능한 요소로 제한한다.

 

이는 바람직한 평가 태도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의 자아는 누가 평가하는지에 따라 그 다면성의 정도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일관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인식하기에, 우리는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누군가는 의문을 가질지 모른다.

‘우리가 무한히 다면적이라면, 무한한 모습을 아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어떠한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가. 단순히 다면성의 파악 가능성에 대한 모순적 인식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다면성이 존재하는 한 정확한 자기 인식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확한’ 자기 인식은 불가능한 것이 맞다. 그때그때 무한히 변화하는 나 자신을 어떻게 하나하나 관찰하여 정리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올바른’ 자기 인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확성이 올바름의 필수적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에 대해 알아나가려면, 나의 다면성을 모두 아우르는 포괄적 ‘나-인식’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다면적 면모 하나하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존재적 특성을 생각해보 아야 한다. 여기에서 꿈을 이용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꿈을 소원 성취라고 보았다. 이때의 소원은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바라는 것의 범위에 들어갈 수 있는 내용에는 단순한 감각적 욕구 충족에서부터, 나의 자아와 주변인과의 연결성에 대한 심오한 고민까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사실 나의 다면성을 생각하면 그 광범위성은 당연하다. 즉 꿈 속 소원의 광범위함도, 우리의 자아가 다면적임을 암시하고 있던 것이다.

 

 

-구와 원의 비유

 

프로이트의 꿈에 대한 창의적이고 새로운 표현들은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찰해볼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되어준다. 다만,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중에는 동의할 수 없는 주장도 많다. 그의 글은, 사례 중심으로 차곡차곡 쌓아서 만든 탑을 보는 듯하다. 그에 반대되는 사례를 제시하면 무너지고 만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제시하는 꿈에 대한 견해는 새로운 발상으로의 통로로서만 이용할 것이다. 어쩌면 결국 프로이트가 해당 표현을 쓰는 맥락과 겹칠 수도 있고, 빗나거나 아예 반대될 수도 있다. 글 첫머리에서의 ‘다면성’이라는 말은 추상적이게 다가올 수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구와 원의 비유를 이용하고자 한다.

 

사람은 마치 2차원 세계에서 보는 3차원의 구와도 같다. 2차원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원만을 볼 수 있고, 저것은 원이라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는 온전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2차원 세계 속 존재들의 눈에는 단순한 면으로 보일지라도, 구의 본질은 3차원의 구이다. 그리고 구와 같은 입체는 무한히 많은 2차원의 면의 집합이다. 식빵을 자를 때처럼 구를 자른다고 생각해보라. 다만 식빵과 달리 상상 속 구는 무한히 많은 단면으로 자를 수 있다. 하나의 면의 두께는 n/∞이므로 0에 수렴한다. 여기서 구를 ‘나’의 정체성으로 본다면, ‘나’라는 실체를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속성들은 무한히 많이 모여서 나를 형성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구와 구가 겹칠 때 2차원 사람들은 원끼리 만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원을 접하고 있다. 내가 접한 이것의 속성은 원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구의 어느 부분들이 접촉했는지 2차원의 사람들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이다. 구와 구가 맞닿을 때의 접촉면의 종류도 무한히 다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형성할 때, 상황마다, 대하는 상대마다, 접촉의 깊이의 정도마다, 매번 상대에게 보이는 우리의 면모와 우리에게 보이는 상대의 면모는 다른 관계 형성에서와 달라진다. 구와 구의 접초면이 매번 달라지듯이. (글 하단의 [붙임1] 참조)

 

 

-'다면적인 나'의 형성 : 프로이트의 이론을 통한 설명

 

그렇다면 그토록 다면적인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어떻게 숨겨지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다면성을 지녔다는 것은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면서도, 교묘히 숨겨져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너는 다면적인 사람이야. 하나의 정해진 모습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라고 말한다면 그는 기꺼이 수긍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바로 그 다면성 때문에 너는 정확한 자기 인식을 할 수 없어.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야’라고 말한다면, 그는 곧바로 반박하려 할 테다. 이는 다면성이 존재감은 드러내면서도 구체적으로 얼마만큼 다면적인지까지는 알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꿈은 그 내용을 왜곡하여 다면성을 숨기는 역할을 훌륭히 해낸다. 다면성이 얼마나 큰지 정확히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꿈은 엄격한 검열 과정을 거친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꿈에서 되풀이되는 불쾌한 감정이 소원의 존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꿈 주제나 주제에서 비롯되는 소원을 혐오하고 억압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꿈들이 왜곡되고 소원 성취가 알아볼 수 없 게 위장한다고 충분히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꿈은 (억압되고 억제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이다.>’(p.206)라고 말한다. 내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의 욕망이 있을 때, 꿈에서만큼은 그 욕망이 드러나지만 변형되어 반영된다. 예컨대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어린 소년의 소망은, 아버지가 일을 떠나서 영원히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표현된다. 짝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하는 여성의 소망은, 조카의 장례식에 가는 것으로 표현된다.

 

또 다른 프로이트의 표현을 보자면, ‘밝혀진 꿈-사고 가운데 최소한의 것만이 꿈속에서 표상 요소를 통해 표현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압축이 <생략>을 통해 일어난다고 추론해야 할 것이다. 꿈은 꿈-사고의 충실한 번역이나 원래 그대로의 투사가 아니라 극도로 불완전하고 결함 많은 묘사이다.’(p.339)라고 말하고 있다. 꿈은 우리의 속내를 고스란히 투영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원래 그대로의 특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결함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왜곡, 전위, 생략과 같은 검열은 우리에게 다면성이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다면적인 모습이 있기에, 한 면에서의 ‘나’가 바라는 나의 욕망이 다른 면의 ‘나’로서는 차마 드러 낼 수 없는 경우도 생긴다. 우리의 자아는 수없이 다양한 면모가 집단으로 모여 하나의 단일한 ‘나’가 된 것이기에, 그 각기 다른 면모들이 바라는 것, 생각하는 것, 옳다고 판단하는 것, 세상을 보는 방식 등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즉 다면적인 내가 형성된 것은 내 자아가 다양한 면모가 모여서 만들어져각기 다른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면성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

 

그렇다면 이러한 다면성에 대해 논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중요할까. 이는 앞에서 본 모순적인 태도를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타인이 우리를 인식하는 상황에서는 우리의 다면성을 강조하지만, 내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상황에서는 다면성을 과소평가한다. 즉 한 명의 인식에 대해서 서로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다. 이를 바로잡을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각각의 상황을 심도 있게 분석하여, 무엇이 우리의 다면성 고려 정도를 결정지었고 그러한 고려 정도가 우리의 자기 인식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렇게 분석한다면, 두 잣대로 하나의 존재를 판단할지라도 서로 다른 기준들에 휘둘리지 않고 넓은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지나친 품이 든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기에 두 번째 방법이 대두된다. 바로, 애초에 다면성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남이 나를 판단하는 상황, 내가 나를 판단하는 상황에서의 이중 잣대의 문제는 없던 일이 된다. 이러한 두 번째 방법, 즉 ‘자신에 대해 인식할 때 다면성을 충분히 고려 하는 태도’를 성취하는 데에는 꿈이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꿈은 다면성이 숨겨지는 방식의 하나임과 동시에, ‘숨겨진’ 형태로 ‘표출’되는 방식 중 하나이다. ‘숨겨져 있다’라는 표현에서 ‘있다’라는 말에 주목하는 셈이다. 바로 이 표출이 중요하다. 꿈에서의 검열에는 우리의 다면성이 전제되어있기에, 이는 반대로 소원 성취의 검열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스스로의 다면성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나라는 존재의 다면성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 다면성이 꿈 속 소원 성취의 왜곡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다면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무한히 다면적이기에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나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알기 위한 방안은, 다면적인 면모 하나하나를 뜯어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면적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라고도 이야기했다. 그렇듯 다면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꿈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꿈이 지닌 정밀성 덕분이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그것(꿈)은 완벽한 심리적 현상이며, 정확히 말해 소원 성취다. 또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깨어 있는 동안의 정신 활동 속에 배열될 수 있으며, 아주 복잡한 정신 활동에 의해 형성된다.’(p.163)라고 말한다. 이 표현은 꿈이 그저 무질서한 이미지의 나열이 아님을 보여준다. 또, ‘자극에 대한 허용 가능한 해석 중에서 영혼 안에 숨어 있는 소원 충동과 가장 잘 결합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런 식으로 명백하게 결정되어 있으며, 자의에 맡겨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릇된 해석은 착각이 아니라 핑계이다.’(p.289)라는 표현에서도, 꿈은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꿈의 형성 과정에서는 숨겨진 소망을 가장 잘 표현하려는 노력이 전개되고 있음을 말한다. 이 역시 우리의 ‘영혼 속에 숨어 있는’ 소망, 즉 다면적인 소망을 꿈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근거이다.

 

결과적으로, 꿈을 통해 다면성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에게 무한한 다양한 면모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는 기존에 알고 있던 자신이 그저 정체성의 단편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고, 나의 정체성을 하나로 정의내리지 않는 태도로 이어진다. 그것으로 충 분하다고 말하고 싶다. ‘올바른’ 자기 인식이란 거창한 게 아니다. 내게 변화하는 여러 면모 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2차원의 세계에서 원만 보일지라도 그 실체는 ‘구’라는 것을 아 는 것. 이는 전체로서의 나를 조망하는 길이기에, 내가 누구인지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방법이 된다.

 


[붙임 1] 

차례대로 <그림 1>, <그림2>, <그림3>

<그림1> : 2차원의 존재에게는 구가 원으로 인식된다. 이는 단편적인 나의 몇몇 면모만으로 ‘나’라는 정체성을 설명하려는 태도에 비유된다.

<그림2> : 구 두 개의 접촉이 2차원에서 인식될 때의 모습은, 그저 원 두 개의 만남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할 때, 지금 보이는 그 사람의 모습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하지 만 이는 사실 우리가 모두 ‘구’와 같다는 본질을 잊어버린 태도이다.

<그림3> : 구 두 개가 만났을 때, 접촉면의 크기, 위치, 각도 등은 무한히 다양하다. 이처럼 우리는 누군가와 만날 때, 즉 관계를 형성할 때, 무한히 다른 면모를 보일 수 있다. 나의 잠재된 면모도 무한하고, 타인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우리의 자아 자체가 무한히 많은 모습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나 교양수업 과제글로 썼던 보고서입니다.. 과제들을 모아두었던 폴더가 실종되어서(?)

학교 ETL에서 새로이 다운받아서 티스토리를 글 저장 아카이브..로 써먹는 중....입니다.

티스토리에 맞게 소제목들도 좀 붙이고 이탤릭체도 쓰고 밑줄도 긋고...

 

생각글 폴더에 올릴까 하다가... 책 기반이니까 일단 책 리뷰 게시판에...

그래도 일단 생각글에서처럼 생각의 출처를 남겨놓자면..

 

구와 원의 비유 생각의 출처는

고1 때 굉장히 좋아하던,, 웃는 모습이 너무 예쁘고 목소리가 천사같았던 영어쌤을 보면서

"물론 저 쌤이 학생들을 대하는 모습은 본인의 친한 지인들을 대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겠지? 그렇지만 그 중에서 '어떤 모습은 진짜고 어떤 모습은 가짜다'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구끼리 맞닿을 때의 접촉면이 다양하듯이 그냥 다양한 면모가 있는 것일 뿐이니까.. 나는 '학생들이라는 구와 맞닿을 때'의 저 쌤의 모습이 좋은 거야! 사실 다른 모습은 딱히 알고 싶지도 않고 중요치도 않아!"

라고 생각한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ㅎㅎ 

거의 영어쌤 팬이었네요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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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포스트모던 연극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연극의 기법 자체에 주목할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재미있달까요.

그런 이유에서 굉장히 흥미롭게 본 국립극단의 연극, '나는 살인자입니다' 리뷰를 가져와봅니다.

호시 신이치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제작된 이 연극은 2019년도에 교양수업 과제로 본 것이었으나... 자극적인 제목으로 인해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던 저에게 기분좋은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3년 전에 쓴 글이라 조금,, 수정하고픈 부분들도 보입니다만

나름 교수님께 내용적으로는 칭찬받았던 글이라서 일단 그대로 가져와 봅니다ㅋㅋ

당시 레포트엔 사진 자료는 넣지 않았지만,, 블로그글이니까 연극 분위기 느껴지게끔 사진도 좀 섞어서...

 

오랜만에 연극 보러가고 싶어지네요


 

*는 주석 표시입니다.

 

연극 <나는 살인자입니다>에서 형식적 기법의 효과

: 언어 표현 방식과 시각적 인상을 중심으로

 

                                           

1. 머리말

 

꽤나 예전에 본 연극인데도 아직까지 배우들의 얼굴이 낯익다. 진짜 인상깊게 봤나 보다.

 

<나는 살인자입니다>는 일본의 작가 호시 신이치(1926-1997)쇼트-쇼트형식의 초단편 소설을 모아서 구성한 연극이다. 호시 신이치는 인간 존재에 숨겨진 공포의 본질을 메마르고 잔혹한 관점으로 날카롭게 응시하는 데서 출발했다’*라고 평가받는다. 각각의 짧은 에피소드에는 반전이 담겨 있고, 어딘가 괴기스럽지만 그렇기에 더욱 어두운 현실을 들춰낸다. 연극은 에피소드 6개로 나뉘어 있으며, 각각의 에피소드가 무대의 암전으로 구분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현대 문명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작가가 의도적으로 현대 문명을 비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글을 쓴다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바탕으로 사회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다 보니 현대 문명에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된다고 일컬어진다.** 에피소드의 내용은 모두 기이한 미스터리 장르인데, 인간과 흡사한 로봇이 바에서 일하는 이야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한 청년의 이야기,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을 이용하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악마를 괴롭히며 놀던 부부가 결국 파멸하는 이야기, 우주에서 표류하며 편지를 쓰는 남자 둘의 이야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장치를 발명한 과학자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전통적 연극과는 사뭇 다른 이 연극에서 두드러지는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자면 언어시각적 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연출가는 언어를 사용해서, 그리고 시각적인 인상을 사용해서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전통적 연극과는 사뭇 다른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언어 자체’ ‘시각적 인상 자체를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기법을 빌려왔을 뿐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에서는 텍스트라는 하나의 도구를 통해 다룬 주제를, 연극에서는 다양한 표현 수단을 덧붙여 서술하는 것이다.

 

 

2.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

 

이 공연은 연극인데도 불구하고 서술자가 있는 서사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원작 소설의 텍스트를 그대로 살려서 내레이션을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거의 원작 소설을 그대로 대본화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소설에서 따옴표 안에 들어 있었던 내용만을 대사로 말하며 줄글이었던 부분은 내레이션을 한다. ‘보여주기가 아닌 이야기하기형태로 연극이 진행되는 것이다. 희곡의 형태로 바꾸지 않고 소설의 텍스트를 그대로 가져온 것은 단순히 그 변환 과정의 번거로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텍스트를 가져와서 해설하는 방식을 통해, 이 연극은 이것이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 무대 위의 사실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내레이션을 하는 방식에서는 배우와 역할의 분리가 나타난다. ‘해설자 역할을 하는 배우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며, 한 에피소드 내에서도 여러 배우가 돌아가면서 내레이션을 한다. 예컨대 첫 번째 에피소드인 봇코짱에서는 내레이션을 처음에는 바 주인이 했다가, 갑작스럽게 뒤에 있는 손님이 일어서면서 내레이션을 시작하기도 한다. 자신과 관련 있는 내용이 나올 때 그 부분의 내레이션을 하는 방식이다. 이때 무대 위 다른 인물들은 그 내레이션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역할이 듣지 못할 뿐, ‘배우들은 내레이션을 하는 배우를 쳐다보기도 하고 그에 조금씩 반응하기도 한다. 배우와 역할이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무대 위에서 직접 보여주며 관객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거울' 中

 

이때 내레이션에 배우가 원래 맡은 역할의 감정이 들어가서 화난 어투즐거운 어투로 내레이션을 하는데, 이는 내레이션을 하는 역할과 원래 배우가 맡은 역할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것이다. 즉 여전히 역할로서의 자아를 유지한 채로 내레이션을 한다. 방백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어투는 소설 속 서술 부분과 같이 ‘~이다로 끝나는 문어체이다. 여러 역할이 뒤섞인다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 뒤섞임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내레이션뿐만 아니라 대사를 하는 방식 또한 관객이 극 속 상황이 진짜라고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대사를 평범한 말하기 속도보다 느리게 말하기도 하고, 경망스럽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높은 음조로 말하기도 하며, 대사를 한 음절마다 끊어서 말하기도 한다. 즉 일상어에 비해 과장되어 있다. 주인공의 존재를 부정하는 대사처럼, 특별한 내용의 대사는 말할 때 다른 사람이 메아리를 넣듯이 말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태풍 소리를 여러 배우가 입으로 만들어내는 장면에서는 언어는 사라지고, 배우들이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해진다. 관객들은 저 소리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저 기이함과 압도감을 느낄 뿐이고, 이어지는 대사를 듣고서야 태풍이 지나가는 장면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언어의 내용보다는 그것이 주는 느낌이 강조되는 것이다. 연극이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적 기법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주제를 전달하는 데에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3. 시각적 인상을 주는 방식

 

먼저 즉석에서 촬영한 영상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는 두 번째 에피소드인 아는 사람과 세 번째 에피소드인 이봐, 나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기법이다. ‘아는 사람에서는 배우의 얼굴을 한 명씩 카메라로 즉석에서 찍으면서 그것을 뒤의 화면을 통해서 보여준다. 이는 마치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을 관객이 공유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관객이 실제로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처럼 몰입하기에는 영상의 초점도 잘 맞지 않고, 카메라가 줌 인과 줌 아웃을 반복하며 집중을 깬다. 즉 카메라의 사용은 몰입이라기보단 오히려 관객이 주인공의 상황과 에피소드의 주제에 대해 생각에 잠기게 하는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주인공이 놓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지,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옳았을지 생각해보는 계기를 주는 셈이다.

 

'이봐, 나와!' 中

 

, 뒤의 화면으로 막이 바뀔 때 영상을 틀고 이번 에피소드의 제목을 적어놓는다. 즉 다른 막으로 넘어갈 때 완전한 암전이 아니기에 화면 빛을 통해 무대를 바꾸는 과정을 관객이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막의 전환 과정은 그저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라는 효과만이 아니라, 이것이 연극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알리는 역할도 한다.

 

역할이 아닌 배우에 주목하게 하는 방법으로, ‘이라는 실제 존재하는 대상에 초점을 맞추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배우의 몸의 사용은 세 번째 에피소드 이봐, 나와!’, 그리고 여섯 번째 에피소드 장치 한 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이봐, 나와!’에서는 모든 내용을 몸으로 표현한다. 다리나 팔을 올려서 울타리, 크레인 모양을 만들어 크레인이 구멍을 메우는 장면을 표현하기도 하고, 배우들이 누워서 머리를 모아 원을 만든 후, 그 원을 유지한 채로 몸을 굴리며 돌기도 한다. 그러한 몸의 활용이, 위에서 찍는 카메라에서 송출되는 영상을 무대 배경에 보여주는 것과 더불어 일어난다. 

장치 한 대에서는 흰색 옷을 입은 배우들이 있는 무대 중심부만을 조명이 비추고 주변은 암전이 되어 있으며, 조명은 시간적 배경에 맞추어 저녁노을의 색이지만 배우들이 있는 바로 그 부분은 더 밝다. 이러한 무대장치는 배우들의 하얀 옷이 돋보이게 하여, 배우들이 있는 중심부에만 온 집중을 쏟게 만든다. 그 상태에서 배우들은 서로 뭉치고, 팔을 뻗고, 머리를 수그렸다 폈다 하며, 하나의 흰색 덩어리가 꿈틀대는 듯한 느낌을 형성한다. 또한, 배우 중 한 명이 대사를 말하고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이야기 맥락에도 맞지 않고 그 자체로도 이상한 여러 행위를 한다. 혀를 내밀기도 하고, 눈을 크게 뜨거나, 입을 벌렸다 닫는 행위를 반복하기도 한다. 관객들은 이를 보며 대사에 집중하기보다는 왜 저런 행위를 하는 것일지, 의미가 있는 행위일지 등에 궁금증을 갖게 되고, 행위의 기괴함에 불쾌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해당 에피소드의 내용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장치가 핵무기, 화학무기 등보다는 오히려 낫다는 메시지를 함축하며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것이기에, 인간에 대해 불쾌함을 느끼게 하는 것도 어쩌면 목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내용을 표현하는 기능보다는 관객이 집중을 못 하게 만든다라는 점이 중요하다. 극 속에서 과학자가 죽는 장면을 표현할 때도, 과학자 역할의 배우는 턱을 다른 배우들의 어깨 부분에 기대고서 오른쪽으로 몸선을 따라 머리를 툭툭 떨어뜨리더니 마지막에는 몸을 수그려서 자신이 관객에게 보이지 않게 만든다. 단순히 과학자가 죽었다라고 해설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나타내는 몸짓을, 느린 속도로 굳이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관객에게 내용에 집중하기 어렵게 만든다.

 

'장치 한 대' 中

 

이렇듯 누가 봐도 행위 예술적이라고 느낄 만한 방식뿐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퍼포먼스라고 부를 만한 요소도 등장한다. , 텍스트만 있는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배우의 몸 자체에 주목하게 한다거나, 배우가 역할과 분리된 하나의 존재로서 무대 위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신의 역할이 등장할 차례가 아니어도 배우는 계속 무대에 머물러서 벽 한쪽에 기대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 아는 사람은 주인공이 남자이지만 이를 여자 배우가 맡는다. 현상으로서의 몸과 기호로서의 몸을 불일치시키면서, 관객들에게 어색함과 이질감을 유발하는 것이다. 또 해당 에피소드에서 배우가 갑자기 오리걸음을 하며 대화하기도 한다. 이때는 주인공이 회사를 찾아간 장면이었으므로 오리걸음을 하는 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저 상황이 회사에 간 주인공이라는 극 속 상황에 몰입할 수 없다. 오히려, 배우들의 가쁜 호흡이 들려오며 힘들겠다라는, 역할이 아닌 배우에 주목하게 된다. 무대 위 다른 하나의 세계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현실 세계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비현실적일 정도로 느린 속도로 움직이기도 한다. 느린 속도의 움직임은 관객들이 행위자인 배우의 육체적 긴장에 조응하여 스스로 긴장하게 만든다. 즉 움직임이 역할로서의 행동을 벗어나서, 배우의 몸을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러한 요소를 통해,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읊음에도 소설과는 차별성을 보인다. 대사를 소설 그대로 했지만, 그 표현 방식은 다르다. 즉 연극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가 아닌 관객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행위임을 알린다. , 이처럼 배우들이 몸을 쓰는 방식이, 극 속 이야기의 맥락에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시각적 인상을 주기 위해서 몸을 쓰고 있다고 말하기는 적합하지 않다. 연극의 내용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연극에서 배우들의 몸의 사용은, 어딘가 이질감을 주어 관객이 연극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서 그것을 보게 만드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따라서 몸의 사용은 앞에서 살펴본 내레이션의 사용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무대는 단순하다. 전체적으로는 사다리꼴 모양이며, 벽은 거울로 되어 있어서 배우의 옆, 뒷모습까지 관객이 볼 수 있다. 무대 배경은 화면으로 되어 있어서 막이 바뀔 때 영상을 틀거나, 카메라로 찍는 영상을 바로 틀어주기도 한다. 무대장치는 첫 에피소드에서는 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탁자, 의자 등을 배치해두지만 그다음 에피소드부터는 의자 몇 개 정도가 전부이다. 한 에피소드 내에서 집, 회사, 길거리 등 여러 장소로 이동하지만 이는 대사를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 무대 자체는 그대로이다. 브레히트는 간단하게 무대장치를 만듦으로써, 시공간적인 제약을 없애고 관객들이 이성과 상상력을 통해 무대를 구성하게 만들고자 했다.**** 이 연극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관객이 상상력으로 무대를 꾸밀 수 있도록 무대장치가 적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러 에피소드가 집 안에서부터 우주까지, 각기 상당히 다른 장소에서 펼쳐지기에 더욱 그렇다. 이를 통해 무대가 실제 극 속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허구의 세계를 관객들이 믿게 만들려는 데에 연극의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연극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지각시킨다.

 

'봇코짱' 中

 

 

4. <나는 살인자입니다>가 형식적 기법들로 얻는 효과

 

연극에서는 내레이션의 사용 등을 통해 배우가 자신의 역할에서 벗어나 배우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인식시킨다. 또 텍스트를 그대로 가져왔지만, 배우들의 몸을 활용한 퍼포먼스적인 요소를 넣어 소설과 차별점을 둔다. 배우가 실제로 무대 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고, 연극에 기이한 분위기를 더하며 관객이 줄거리에 몰입하기보다는 한발 떨어져 생각하게 한다. 현대 문명과 그 속에서 사는 인간들의 모습에 대해 고민하게끔 하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극의 구성이 에피소드 형식이라는 것도, 같은 배우가 다른 역할로 바뀌는 것을 계속 목격하게 함으로써 하나의 줄거리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몰입을 방해함으로써, 연극을 단순히 흥미로운 공포 SF 이야기로만 여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생각을 기울여보게 된다. 제목도 그러한 비판의식을 가지기를 촉구하고 있다. ‘나는 살인자입니다에서 는 특정되지 않는다. 여러 에피소드가 결합한 형식이기에 더욱 한 명의 주인공을 칭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는 현대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어느 측면에서는 살인자라고 이야기하는 셈이다. 관객을 포함한 현대 문명 속 인간 모두에 대한 비판을 담음과 동시에, 연극을 보면서 스스로 생각하게, 성찰하게 만든다. 그러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으므로 단순한 미스터리 장르로만 여겨지지 않도록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를 넣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

*<나는 살인자입니다>(팸플릿), 국립극단, 2019, 4. (곤다 만지, 호시 신이치의 세계 9.4, 1976에서 재인용)

**Ibid., 5.

***심재민, 포스트드라마의 몸 : 현상학적인 몸의 현존 방식에 대한 레만의 해석, 한국연극학 Vol.0 No.42, 한국연극학회, 2010, 171.

****강충권, 「<닫힌 방>의 서사극적 특징에 대한 연구, 프랑스어문교육18, 프랑스어문교육학회, 2004, 351.


참고문헌

 

강충권, 「<닫힌 방>의 서사극적 특징에 대한 연구, 프랑스어문교육18, 프랑스어문교육학회, 2004.

백인경, 에리카 피셔-리히테의 퍼포먼스 이론 연구 : '수행적인 것의 미학'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심재민, 포스트드라마의 몸 : 현상학적인 몸의 현존 방식에 대한 레만의 해석, 한국연극학Vol.0 No.42, 한국연극학회, 2010.

<나는 살인자입니다>(팸플릿), 국립극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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