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포스트모던 연극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연극의 기법 자체에 주목할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재미있달까요.
그런 이유에서 굉장히 흥미롭게 본 국립극단의 연극, '나는 살인자입니다' 리뷰를 가져와봅니다.
호시 신이치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제작된 이 연극은 2019년도에 교양수업 과제로 본 것이었으나... 자극적인 제목으로 인해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던 저에게 기분좋은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3년 전에 쓴 글이라 조금,, 수정하고픈 부분들도 보입니다만
나름 교수님께 내용적으로는 칭찬받았던 글이라서 일단 그대로 가져와 봅니다ㅋㅋ
당시 레포트엔 사진 자료는 넣지 않았지만,, 블로그글이니까 연극 분위기 느껴지게끔 사진도 좀 섞어서...
오랜만에 연극 보러가고 싶어지네요
*는 주석 표시입니다.
연극 <나는 살인자입니다>에서 형식적 기법의 효과
: 언어 표현 방식과 시각적 인상을 중심으로
1. 머리말
<나는 살인자입니다>는 일본의 작가 호시 신이치(1926-1997)의 ‘쇼트-쇼트’ 형식의 초단편 소설을 모아서 구성한 연극이다. 호시 신이치는 ‘인간 존재에 숨겨진 공포의 본질을 메마르고 잔혹한 관점으로 날카롭게 응시하는 데서 출발했다’*라고 평가받는다. 각각의 짧은 에피소드에는 반전이 담겨 있고, 어딘가 괴기스럽지만 그렇기에 더욱 어두운 현실을 들춰낸다. 연극은 에피소드 6개로 나뉘어 있으며, 각각의 에피소드가 무대의 암전으로 구분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현대 문명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작가가 의도적으로 현대 문명을 비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글을 쓴다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바탕으로 사회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다 보니 현대 문명에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된다고 일컬어진다.** 에피소드의 내용은 모두 기이한 미스터리 장르인데, 인간과 흡사한 로봇이 바에서 일하는 이야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한 청년의 이야기,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을 이용하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악마를 괴롭히며 놀던 부부가 결국 파멸하는 이야기, 우주에서 표류하며 편지를 쓰는 남자 둘의 이야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장치’를 발명한 과학자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전통적 연극과는 사뭇 다른 이 연극에서 두드러지는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자면 ‘언어’와 ‘시각적 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연출가는 언어를 사용해서, 그리고 시각적인 인상을 사용해서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전통적 연극과는 사뭇 다른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언어 자체’ ‘시각적 인상 자체’를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기법을 빌려왔을 뿐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에서는 ‘텍스트’라는 하나의 도구를 통해 다룬 주제를, 연극에서는 다양한 표현 수단을 덧붙여 서술하는 것이다.
2.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
이 공연은 연극인데도 불구하고 서술자가 있는 서사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원작 소설의 텍스트를 그대로 살려서 내레이션을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거의 원작 소설을 그대로 대본화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소설에서 따옴표 안에 들어 있었던 내용만을 대사로 말하며 줄글이었던 부분은 내레이션을 한다. ‘보여주기’가 아닌 ‘이야기하기’ 형태로 연극이 진행되는 것이다. 희곡의 형태로 바꾸지 않고 소설의 텍스트를 그대로 가져온 것은 단순히 그 변환 과정의 번거로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텍스트를 가져와서 해설하는 방식을 통해, 이 연극은 이것이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 무대 위의 사실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내레이션을 하는 방식에서는 배우와 역할의 분리가 나타난다. ‘해설자 역할’을 하는 배우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며, 한 에피소드 내에서도 여러 배우가 돌아가면서 내레이션을 한다. 예컨대 첫 번째 에피소드인 ‘봇코짱’에서는 내레이션을 처음에는 바 주인이 했다가, 갑작스럽게 뒤에 있는 손님이 일어서면서 내레이션을 시작하기도 한다. 자신과 관련 있는 내용이 나올 때 그 부분의 내레이션을 하는 방식이다. 이때 무대 위 다른 인물들은 그 내레이션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역할’이 듣지 못할 뿐, ‘배우’들은 내레이션을 하는 배우를 쳐다보기도 하고 그에 조금씩 반응하기도 한다. 배우와 역할이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무대 위에서 직접 보여주며 관객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이때 내레이션에 배우가 원래 맡은 역할의 감정이 들어가서 화난 어투‧즐거운 어투로 내레이션을 하는데, 이는 ‘내레이션을 하는 역할’과 원래 ‘배우가 맡은 역할’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것이다. 즉 여전히 ‘역할로서의 자아’를 유지한 채로 내레이션을 한다. 방백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어투는 소설 속 서술 부분과 같이 ‘~이다’로 끝나는 문어체이다. 여러 역할이 뒤섞인다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 뒤섞임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내레이션뿐만 아니라 대사를 하는 방식 또한 관객이 극 속 상황이 ‘진짜’라고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대사를 평범한 말하기 속도보다 느리게 말하기도 하고, 경망스럽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높은 음조로 말하기도 하며, 대사를 한 음절마다 끊어서 말하기도 한다. 즉 일상어에 비해 과장되어 있다. 또 ‘주인공의 존재를 부정하는 대사’처럼, 특별한 내용의 대사는 말할 때 다른 사람이 메아리를 넣듯이 말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태풍 소리를 여러 배우가 입으로 만들어내는 장면에서는 ‘언어’는 사라지고, 배우들이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해진다. 관객들은 저 소리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저 기이함과 압도감을 느낄 뿐이고, 이어지는 대사를 듣고서야 태풍이 지나가는 장면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언어의 내용보다는 그것이 주는 느낌이 강조되는 것이다. 연극이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적 기법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주제를 전달하는 데에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3. 시각적 인상을 주는 방식
먼저 즉석에서 촬영한 영상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는 두 번째 에피소드인 ‘아는 사람’과 세 번째 에피소드인 ‘이봐, 나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기법이다. ‘아는 사람’에서는 배우의 얼굴을 한 명씩 카메라로 즉석에서 찍으면서 그것을 뒤의 화면을 통해서 보여준다. 이는 마치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을 관객이 공유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관객이 실제로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처럼 몰입하기에는 영상의 초점도 잘 맞지 않고, 카메라가 줌 인과 줌 아웃을 반복하며 집중을 깬다. 즉 카메라의 사용은 ‘몰입’이라기보단 오히려 관객이 주인공의 상황과 에피소드의 주제에 대해 생각에 잠기게 하는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주인공이 놓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지,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옳았을지 생각해보는 계기를 주는 셈이다.
또, 뒤의 화면으로 막이 바뀔 때 영상을 틀고 이번 에피소드의 제목을 적어놓는다. 즉 다른 막으로 넘어갈 때 완전한 암전이 아니기에 화면 빛을 통해 무대를 바꾸는 과정을 관객이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막의 전환 과정은 그저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라는 효과만이 아니라, 이것이 연극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알리는 역할도 한다.
역할이 아닌 배우에 주목하게 하는 방법으로, ‘몸’이라는 실제 존재하는 대상에 초점을 맞추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배우의 몸의 사용은 세 번째 에피소드 ‘이봐, 나와!’, 그리고 여섯 번째 에피소드 ‘장치 한 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이봐, 나와!’에서는 모든 내용을 몸으로 표현한다. 다리나 팔을 올려서 울타리, 크레인 모양을 만들어 ‘크레인이 구멍을 메우는 장면’을 표현하기도 하고, 배우들이 누워서 머리를 모아 원을 만든 후, 그 원을 유지한 채로 몸을 굴리며 돌기도 한다. 그러한 몸의 활용이, 위에서 찍는 카메라에서 송출되는 영상을 무대 배경에 보여주는 것과 더불어 일어난다.
‘장치 한 대’에서는 흰색 옷을 입은 배우들이 있는 무대 중심부만을 조명이 비추고 주변은 암전이 되어 있으며, 조명은 시간적 배경에 맞추어 저녁노을의 색이지만 배우들이 있는 바로 그 부분은 더 밝다. 이러한 무대장치는 배우들의 하얀 옷이 돋보이게 하여, 배우들이 있는 중심부에만 온 집중을 쏟게 만든다. 그 상태에서 배우들은 서로 뭉치고, 팔을 뻗고, 머리를 수그렸다 폈다 하며, 하나의 ‘흰색 덩어리’가 꿈틀대는 듯한 느낌을 형성한다. 또한, 배우 중 한 명이 대사를 말하고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이야기 맥락에도 맞지 않고 그 자체로도 이상한 여러 행위를 한다. 혀를 내밀기도 하고, 눈을 크게 뜨거나, 입을 벌렸다 닫는 행위를 반복하기도 한다. 관객들은 이를 보며 대사에 집중하기보다는 왜 저런 행위를 하는 것일지, 의미가 있는 행위일지 등에 궁금증을 갖게 되고, 행위의 기괴함에 불쾌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해당 에피소드의 내용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장치’가 핵무기, 화학무기 등보다는 오히려 낫다는 메시지를 함축하며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것이기에, 인간에 대해 불쾌함을 느끼게 하는 것도 어쩌면 목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내용을 표현하는 기능보다는 ‘관객이 집중을 못 하게 만든다’라는 점이 중요하다. 극 속에서 과학자가 죽는 장면을 표현할 때도, 과학자 역할의 배우는 턱을 다른 배우들의 어깨 부분에 기대고서 오른쪽으로 몸선을 따라 머리를 툭툭 떨어뜨리더니 마지막에는 몸을 수그려서 자신이 관객에게 보이지 않게 만든다. 단순히 ‘과학자가 죽었다’라고 해설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나타내는 몸짓을, 느린 속도로 굳이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관객에게 내용에 집중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렇듯 누가 봐도 행위 예술적이라고 느낄 만한 방식뿐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퍼포먼스라고 부를 만한 요소도 등장한다. 즉, 텍스트만 있는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배우의 몸 자체에 주목하게 한다거나, 배우가 역할과 분리된 하나의 존재로서 무대 위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신의 역할이 등장할 차례가 아니어도 배우는 계속 무대에 머물러서 벽 한쪽에 기대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 ‘아는 사람’은 주인공이 남자이지만 이를 여자 배우가 맡는다. 현상으로서의 몸과 기호로서의 몸을 불일치시키면서, 관객들에게 어색함과 이질감을 유발하는 것이다. 또 해당 에피소드에서 배우가 갑자기 오리걸음을 하며 대화하기도 한다. 이때는 주인공이 회사를 찾아간 장면이었으므로 오리걸음을 하는 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저 상황이 ‘회사에 간 주인공’이라는 극 속 상황에 몰입할 수 없다. 오히려, 배우들의 가쁜 호흡이 들려오며 ‘힘들겠다’라는, 역할이 아닌 배우에 주목하게 된다. 무대 위 다른 하나의 세계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현실 세계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비현실적일 정도로 느린 속도로 움직이기도 한다. 느린 속도의 움직임은 관객들이 행위자인 배우의 육체적 긴장에 조응하여 스스로 긴장하게 만든다. 즉 움직임이 ‘역할로서의 행동’을 벗어나서, 배우의 몸을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러한 요소를 통해,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읊음에도 소설과는 차별성을 보인다. 대사를 소설 그대로 했지만, 그 표현 방식은 다르다. 즉 연극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가 아닌 ‘관객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행위’임을 알린다. 또, 이처럼 배우들이 몸을 쓰는 방식이, 극 속 이야기의 맥락에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시각적 인상을 주기 위해서 몸을 쓰고 있다고 말하기는 적합하지 않다. 연극의 내용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연극에서 배우들의 몸의 사용은, 어딘가 이질감을 주어 관객이 연극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서 그것을 보게 만드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따라서 몸의 사용은 앞에서 살펴본 내레이션의 사용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무대는 단순하다. 전체적으로는 사다리꼴 모양이며, 벽은 거울로 되어 있어서 배우의 옆, 뒷모습까지 관객이 볼 수 있다. 무대 배경은 화면으로 되어 있어서 막이 바뀔 때 영상을 틀거나, 카메라로 찍는 영상을 바로 틀어주기도 한다. 무대장치는 첫 에피소드에서는 ‘바’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탁자, 의자 등을 배치해두지만 그다음 에피소드부터는 의자 몇 개 정도가 전부이다. 한 에피소드 내에서 집, 회사, 길거리 등 여러 장소로 이동하지만 이는 대사를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 무대 자체는 그대로이다. 브레히트는 간단하게 무대장치를 만듦으로써, 시공간적인 제약을 없애고 관객들이 이성과 상상력을 통해 무대를 구성하게 만들고자 했다.**** 이 연극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관객이 상상력으로 무대를 꾸밀 수 있도록 무대장치가 적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러 에피소드가 집 안에서부터 우주까지, 각기 상당히 다른 장소에서 펼쳐지기에 더욱 그렇다. 이를 통해 무대가 실제 극 속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허구의 세계를 관객들이 믿게 만들려는 데에 연극의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연극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지각시킨다.
4. <나는 살인자입니다>가 형식적 기법들로 얻는 효과
연극에서는 내레이션의 사용 등을 통해 배우가 자신의 역할에서 벗어나 ‘배우’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인식시킨다. 또 텍스트를 그대로 가져왔지만, 배우들의 몸을 활용한 퍼포먼스적인 요소를 넣어 소설과 차별점을 둔다. 배우가 실제로 무대 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고, 연극에 기이한 분위기를 더하며 관객이 줄거리에 몰입하기보다는 한발 떨어져 생각하게 한다. 현대 문명과 그 속에서 사는 인간들의 모습에 대해 고민하게끔 하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극의 구성이 에피소드 형식이라는 것도, 같은 배우가 다른 역할로 바뀌는 것을 계속 목격하게 함으로써 ‘하나의 줄거리’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몰입을 방해함으로써, 연극을 단순히 ‘흥미로운 공포 SF 이야기’로만 여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생각을 기울여보게 된다. 제목도 그러한 비판의식을 가지기를 촉구하고 있다. ‘나는 살인자입니다’에서 ‘나’는 특정되지 않는다. 여러 에피소드가 결합한 형식이기에 더욱 한 명의 주인공을 칭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는 현대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어느 측면에서는 ‘살인자’라고 이야기하는 셈이다. 관객을 포함한 현대 문명 속 인간 모두에 대한 비판을 담음과 동시에, 연극을 보면서 스스로 생각하게, 성찰하게 만든다. 그러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으므로 단순한 미스터리 장르로만 여겨지지 않도록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를 넣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
*<나는 살인자입니다>(팸플릿), 국립극단, 2019, 4면. (곤다 만지, 호시 신이치의 세계 9.4, 1976에서 재인용)
**Ibid., 5면.
***심재민, 「포스트드라마의 몸 : 현상학적인 몸의 현존 방식에 대한 레만의 해석」, 한국연극학 Vol.0 No.42, 한국연극학회, 2010, 171면.
****강충권, 「<닫힌 방>의 서사극적 특징에 대한 연구」, 프랑스어문교육18집, 프랑스어문교육학회, 2004, 351면.
참고문헌
강충권, 「<닫힌 방>의 서사극적 특징에 대한 연구」, 프랑스어문교육18집, 프랑스어문교육학회, 2004.
백인경, 「에리카 피셔-리히테의 퍼포먼스 이론 연구 : '수행적인 것의 미학'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심재민, 「포스트드라마의 몸 : 현상학적인 몸의 현존 방식에 대한 레만의 해석」, 한국연극학Vol.0 No.42, 한국연극학회, 2010.
<나는 살인자입니다>(팸플릿), 국립극단,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