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에서는 농사개량의 추진 주체와 추진 대상의 비동일성, 소위 ‘식민성’이 어떤 영향을 가져왔는지를, 권업모범장의 성격과 이후 전개된 수도우량품종 도입을 통해 살펴보았다.
우선 권업모범장의 설립과 그 활동에서의 일본 중심적인 특성을 알 수 있었다. 권업모범장은 한말에 한국 정부의 농사시험장 설립을 통한 농업지배를 막으면서 설립되었 고, 이후 식민지기에 조선 총독부 산하로 편입되어 일본 농업 기술을 한국에 강제적 으로 도입하는 방식의 농사개량을 진행하였다. 권업모범장에서의 연구는 조선 전통 농업 기술과 재래품종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닌, 일본의 것을 가져와 그 중 적합한 것을 그대로 이식하는 방식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러한 권업모범장에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식민지 본국의 필요 충족이었다. 이어서 구체적인 사업으로서 우량품종 도입에 대해 살펴보았다. 대체로 우량품종도 입은 생산성 증대를 가져왔지만, 그럼에도 재래품종은 驅逐되고 소수의 우량품종으로 통일되는 등, 전반적인 농사개량 사업의 식민지적인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일본의 기술을 그대로 이식해 오는 과정에서 조선의 농업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품종이 장려되어 생산성이 정체되거나, 일본 기술자들의 기술 부진으로 미단작화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역시 우량품종 도입에 있어서 그 ‘추진 주체’와 ‘추진 대상’ 이 ‘일본’과 ‘조선’으로 달랐기 때문에, 농업기술 이식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파 악할 수 있다.
또, 우량품종의 도입 역시 농사개량 사업의 일부였기에, 전반적인 농사개량이 이러한 ‘식민성’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농사개량 사업은 우선 그 목표 측면에서도 식민지 본국의 사회적 요구가 짙게 반영되었다. 또, 조선의 재래 농업을 경시하며 일본의 기존 연구의 방향성과 기술이 도입되었다. 조선의 미단작화가 그러한 두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본 글은 일제 식민 지배가 조선의 농업 상황에 끼친 영향을 다루되, ‘식민지 억압’의 차원보다는 식민 지배가 가져온 사업 주체-대상 간 비동일성이라는 특수한 상황의 측면에서 파악하고자 했다. 그러한 비동일성이 사업 과정에 깊이 반영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고, 추진 주체의 의도를 추진 대상에 적용하려 하며 여러 부정적 영향이 야기되기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써보았던 과제글 중 가장 재미있게 쓴 글이자 교수님께 '주제의식이 뚜렷하다'라는 칭찬을 거의 처음으로 들은 글. 하지만 동시에,, 나만의 생각과 해석은 없고 이미 진행된 연구의 짜집기에 불과해서 현타도 왔던 글. 학부생 수준에선 어쩔 수 없...다고 위안하려 해도 주변 사람들은 나름 본인만의 문제의식과 참신한 생각을 가지고 글을 쓰는 것 같아서 우울했었던 기억이,,,
조선에서 쌀 생산량의 변화가 1910년대에 성장하다가 1920년대 정체하고, 1930년대에 재성장하는 것은 우량품종의 보급 상황으로 설명된다. 1910년대는 조신력에 의해 생산성이 향상되지만, 1920년대에 들어 곡량도가 수위품종이 되며 생산성이 정체된다. 그 후 1930년대에 다시 생산성이 늘어날 수 있었던 원인은 2세대 품종인 은방주의 보급과 연결되어있었다. 추가로, 남한보다 북한의 쌀 생산성 증대 속도가 더 빨랐던 원인은 우량품종 보급의 생산성 증대 효과가 북한 지역이 더 높았던 것이 통계적 분석이 존재한다. 이처럼 남북한의 생산성 증대 속도 비교를 통해서도 우량품종의 보급이 생산성의 변화와 직결되는 것을 알 수 있다.*22)
다만 앞서 1920년대에 곡량도의 보급이 생산성 정체를 가져왔듯이, 우량품종이 보급되는 것이 늘 긍정적 영향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시대별, 지역별로 품종에 따라 효과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1910년대에는 남한 지방의 조신력만이 우량종 보급이 생산성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고 북한 지역의 일출은 유의미한 생산성 증대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반대로 1920년대에는 북한 지방의 구미만이 증대를 가져온다. 즉 우량품종의 확산과 생산성 향상은 음의 관계를 이루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우량품종의 보급이 생산성 증대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경우에서도 구체적인 품종에 따라 그 효과의 크기는 다르게 나타난다. 1930년대에 남한에서는 은방주가, 북한에서는 육우132호가 생산성 향상에 공헌하지만, 그 효과는 육우132호가 2배 정도 높게 나타난다.*23)
정리하자면 우량품종의 보급은 분명히 생산성 증대에 있어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 사했지만 언제나 양의 관계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이는 1920년대의 정체기를 통해서, 그리고 1930년대 이후의 상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930년대에 은방주가 보급되기 전, 1930년대 초반의 장려품종이 쌀 생산성 증대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내지 못한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쌀 우량품종이 오히려 생산량을 절감하기도 했다는 것이다.*24)
이처럼 우량품종의 보급이 생산성에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준 것은 권업모범장의 식민지 본국 중심성에서 야기된 연구 소홀에서 일부 기인한다. 앞장에서 살펴봤듯이 권업모범장은 기본적으로 깊이 있는 연구 없이 일제 농업 기술을 그대로 조선에 도입함으로써 농사개량을 꾀하고 있었다. 앞서 본 조신력에서 곡량도로서의 주력 품종 교체에서도, 둘 사이의 내비성 차이를 충분히 연구하지 못하여 비료가 증대되는 시대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多肥 시대로 넘어옴에 따라, 농민들은 그나마 조신력보다 내비성이 나은 곡량도로 품종을 교체하며 대응하고자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내비성‧내병성을 갖춘 품종으로서의 은방주를 1922년에야 도입하지만, ‘다비 다수확 품종’으로서 장려된 것은 1930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은방주가 장려품종이 되자마자 재배면적이 급격히 늘고 곡량도는 급격히 면적이 줄게 된 것도 곡량도는 당시 농업 현실에 부적합한 품종이었음을 보여준다.*25)
다만 주의할 점은, 이러한 연구에서의 실책을 ‘의도적인 식민지 탄압'의 방향으로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곡량도의 교체로 생산성이 정체된 것은 일본의 의도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일본 농업기술자들이 조신력과 곡량도를 장려품종으로 선정할 당시는 少肥가 일반적이었으므로 내비성을 크게 고려하지 못한 것은 불가피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생산성의 정체라는 결과 자체보다는 그것을 야기한 원인으로서의 ‘일제 농업 기술의 이식되던 형태’의 문제에 주목하고자 한다.
3.2. 전반적인 농사개량에서의 식민 지배 상황의 영향
3.1 단락에서 우량품종의 생산성을 통해 ‘우량품종의 도입’이라는 구체적인 분야 에서 일제와 조선 간 식민지 관계가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봤다면, 아래의 내용은 식민 지배의 상태가 전반적인 농사개량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살펴볼 것이 다. 우량품종의 도입 역시 농사개량 사업의 하나였기에, 둘은 같은 맥락에 있을 수밖 에 없다. 식민지적 특성은 크게 사업의 목표 수립 측면, 그리고 연구 및 기술 도입의 측면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식민지 본국의 사회적 요구에 따라 농업 기술의 시험 연구가 이루어졌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정책의 추진 주체가 처한 사회적 상황이 정책에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 일로서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식민 지배라는 상황에서는 정책 추진 주체 는 일본이지만 추진의 대상은 한국이기에, 그러한 사회적 요구의 반영이 ‘구조적인 지배’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일제 농업기구에서는 일제가 한국 농업을 구조적으로 지배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들을 펼쳐나갔다. 특히 그러한 특징은 1910년대 후반에서 20년대 초의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1917년 여름부터 일본에서 쌀값이 급격히 오르지만 쌀 수확은 감소한다. 1차대전 특수로 인한 인플레이션, 도시노동자의 쌀 소비 증가, 쌀 상인들의 담합과 투기까지 벌어지며 1918년 7월에 쌀 폭동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또한, 이 시기 한국에서는 1919년에 경기도 지역 중심으로 가뭄이 심하여 농민의 구제가 시급해졌다. 이러한 식량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농산물 생산의 증대가 요청되었다. 덧붙여, 1차 세계대전의 총력전 형태를 보며 식량 자급의 중요성을 일본 정책담당자들이 인식했다는 측면도 있었다. 이러한 일제의 필요 하에 산미증식계획이 수립, 전개되어 한국에서의 농사개량은 일제의 농업발달과 식량의 증산에 궁극적으로 목표를 둔 것이다.*26)
둘째로, 일본 환경에 맞추어 식민지 본국에서 축적된 연구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조선의 기술을 경시하고 일본에서 기술을 수입해오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조선에 맞는 기술 개발이 아니라, 일본 농업 기술을 권업모범장에서 시험해본 결과 조선의 상황에도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것을 그대로 이식할 뿐이었다.*27) 이러한 식민지 본국 위주의 조선 농업 개편의 두 가지 특징은, 조선 농업구조의 米單作化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일본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한국의 쌀 증산’에만 초점을 맞추어, 농업기구 내 기술자들은 한국의 벼농사에 적용할 벼 품종, 재배 방법 등에 집중하여 벼농사에 편중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에 비해 밭농사의 발전은 부진했다. 밭농사는 집중적인 육종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고 식민지 초기와 후기를 비교했을 때 일정 면적당 생산량이 증가한 것은 5개 품종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밭작물은 생산량이 정체되거나 오히려 줄어들었다. 일본의 농업기술자들은 주로 벼농사에 전문이었으므로, 조선 밭농사를 잘 알지 못했으며 재래 농법에 대한 무지는 그에 대한 경시로 이어져 벼농사 부분의 지도가 제대 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28) 더불어 건조한 땅에서의 농업 경험이 부족했던 일본 기술자들의 밭농사 기술 개발 능력의 부진이 그대로 조선에까지 이어진 것도 밭작물 생산량 증대 부진의 요인이다.*29)
1910년대 후반 여러 쌀 폭동 등의 식량문제로 인해 식량 위기 극복이 요구될 시기에는 권업모범장 서산지장을 설치하며 밭작물에 관한 관심을 전개해 나가는 식으로 태도가 변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산미증식계획의 실행으로 쌀 생산을 중심으로 하게 되어, 실제 농업 현장에서 식량용 밭작물 장려 정책은 뒤로 밀려났다. 또 일본에서 식량문제가 해결되어 가며, 굳이 밭작물의 증산까지 시행할 필요가 없게 되기도 했다.*30)
이처럼 미단작화의 경향은 식민지 본국인 일본의 목적과 요구에 좌우되며, 일본의 연구 상황을 그대로 이식할 뿐이었던 당시 농사개량 사업을 잘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동안, 가장 넓은 재배면적을 차지하는 우량품종은 시기에 따라 변화한다. 그 변화 양상은 벼 품종의 특성, 그리고 해당 시기의 사회적인 요인들과 얽혀 있으 며, 이를 구체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주요 벼 품종들의 특성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조신력(早神力)은, 권업모범장이 김제군 백가정길전농장에서 얻어서 경기도, 충남, 충북에 많이 보급된 품종이다. 비료가 적은 환경에서도 비교적 많이 생산되는 것이 장점이지만 동시에 비료가 많아지면 도열병에 약해서 전멸하기도 한다. 즉, 비료를 증대하는 경향에서는 재배에 부적합하다. 품질은 중급이었다.
둘째로 곡량도(穀良都)는, 경북에 처음 들어와서 試作하였지만 구체적인 도입 경로는 불확실하다. 해충의 피해에 약하고, 바람과 비에 잘 쓰러진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 대신 척박한 환경에 잘 견딜 수 있었으며 회복성이 강했다. 소량의 비료는 성장을 도왔으나 다량은 거부 반응을 야기했다. 낟알이 커서 품질이 양호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셋째로 다마금(多摩錦)은, 1908년 권업모범장이 試作하고 조선 남부지방에 보급한 품종으로서, 내비성이 약했지만 척박한 토양이나 가뭄에 강했으며 품질이 뛰어났다.
넷째로 은방주(銀坊主)는 1922년에 익산군 오산면의 이식 농가가 원종을 가져와 재배한 것이 시작점이다. 바람과 비에 쓰러지는 것이 적고, 내병성과 내비성이 강했다. 다만 품질과 맛이 낮았다. 그렇지만 중소립형의 낟알이 1930년대의 쌀 시장의 선호와 잘 맞아 선호되었다.
다섯째로 풍옥(豊玉)이 있다. 은방주를 이용하여 개량된 품종으로서 소립종이며, 비료의 양과 성장 속도가 비례했으며 추위에 잘 견뎠다.*10)*11)
이러한 다섯 가지 주요 품종 외에도 북한 지역에 널리 재배되었던 일출(日出), 구미(龜尾)도 재배면적에서 상위 5대 품종을 구성하기도 했다. 이 중 본 글의 논의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것은 조신력, 곡량도, 은방주이다.
2.2. 우량품종 보급 과정의 전개
일제의 벼 종자 보급정책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한말부터 1925년까지를 제1기로 구분하며, 다양했던 재래품종을 소수의 품종으로 바꾸고 생산되는 쌀의 질을 높이는 시기라고 말한다. 1926년 후를 제2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산미증식계획의 실시와 함께 더 저항력 있고 생산성 높은 벼 품종을 추구하는 시기로 변경되었다고도 본다.*12)
조선의 재래품종은 그 특성상 비료가 많고 물이 풍부한 경우에는 일제의 우량품종보다 생산성이 떨어지지만, 추위를 잘 견디는 등 조선 기후에 적합하며 이삭이 빨리 여물며 발아력이 강하다는 장점도 존재했다.*13) 그렇지만 일제는 조선의 재래 벼 품종보다는 일본의 품종으로 한반도 농업의 품종을 통일시키는 사업으로써 우량품종을 키워 보급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농민들은 일본의 품종에 대해 의문을 가졌지만, 일제는 생산성을 길러야 한다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량품종을 장려하며 권업모범 장과 종묘장을 통해 정책을 이어나갔다.*14) 이는 전반적으로 일본 품종이 조선 품종보다 생산성이 높았던 것의 결과이므로 단순한 억압적 농사개량 정책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일 테다. 다만 일제의 목표가 농업 정책의 핵심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 재래 품종의 보존보다는 일제 농업의 이식이 중심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목표의식에 따라 점차 조선 내 재래품종 대신 우량품종을 재배하는 경향이 지배적이게 된다. 전북의 통계를 사례로 보면, 일본 우량품종을 재배하는 비율은 1912년 10.6%에서, 1917년은 60.6%, 1937년에는 88.6%, 1940년에는 96.9%로 크게 증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비해 조선 전통 재래품종은 1912년의 89.4%에서 1940년의 3.1%로 크게 감소하였다. 즉 재래품종이 밀려나고 소수의 품종으로 통일되는 형태로 우량품종이 확산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우량품종별 작부 면적을 비교함으로써 소수 품종으로 통일되는 경향을 전북의 사례를 통하여 살펴보겠다. 전북이 사례로서 적합한 이유는, 우량품종 으로의 벼의 유전적 획일화가 잘 드러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전북에서 우량품종의 재배 비율이 전체 재배의 80%에 달하기까지 걸린 기간 자체가 전체 조선은 20년 정도가 걸렸으나 전북은 그 절반인 10년이 걸릴 만큼, 소수 품종으로의 통일이 선도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처음에는 수위 자리*15)에 고천수(高千穗)가 있었지만 그러한 경향은 길게 가지 못하고 1912년에 조신력이 1위를 차지한다. 1920년에는 곡량도가 1위를 11년간 유지되다가 1931년에 은방주가 10년 이상 1위를 하면서, 전북에서 벼 재배면적의 78%를 하나의 품종이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상위 2~3개의 품종이 우량품종 재배면적의 80%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1930년대 이후부터는 전체 벼 재배면적의 80%를 차지하여 소수 우량품종으로의 통일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6)
2.3. 시기에 따른 수위품종의 교체 요인
조선 전체에서 대표적으로 재배되던 쌀 품종으로 시기 구분을 하면 1910년대는 조신력, 1920-30년대 중반의 곡량도,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은방주로 나누어 볼 수 있 다.*17) 조선 총독부의 <농업통계표>(1940)의 우량품종별 재배면적의 추이 자료를 기준으로 봤을 때, 재배면적에 있어서 1910년대에는 조신력이 1위를 차지하다가 1920년 대에는 곡량도가 1위가 된다. 곡량도는 1920년대 재배면적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1930년 46만 정보로 최고점에 이르지만 이후 은방주가 1위 면적을 차지한다. 참고로 북한 지방도 1910년대의 일출, 1920년대 구미, 1930년대에는 구미에서 다시 육우(陸 羽)132호로의 교체를 확인할 수 있다.*18)
우량품종의 교체는 수위품종*19)의 특성으로 방향성을 대체로 파악할 수 있다. 전북의 사례를 보면, 초기에는 재래품종에 비해 많은 양의 수확이 가능한 조신력이 수위품종 이지만, 비료가 증대가 도열병을 불러오면서 도열병에 약한 조신력은 사라지고 불량 환경에서도 재배하기 쉽고 품질이 강했던 곡량도가 20년대까지 수위품종의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비료사용이 더 증대되면서 곡량도 또한 내비성과 내병성이 약하고 비와 바람에 쉽게 쓰러진다는 단점 등으로 인해 물러난다. 이후 30년대에 들어서는 은방주가 내병성‧내비성*20)을 고루 갖추었으며, 중소립종이기에 쌀 시장의 선호와 맞아서 쌀의 품질 자체는 떨어짐에도 인기를 끌었다.
즉 주력 우량품종의 교체 방향을 보면 내병성과 내비성을 강화하고, 쌀의 품질보다는 생산되는 수량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성숙기가 빠른 품종으로 교체되어왔다. 물론 그럼에도 일정한 양질성, 안정성의 범위 안에는 있는 상태에서 그러한 변화가 일어난다. 전체적으로 보면, 주력 우량품종의 교체는 재배 기술과 일본 쌀 시장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21)
Ⅱ.본론 1. 권업모범장의 성격에 대한 고찰 1.1. 권업모범장 설립에서의 일제의 농업지배 의도 1.2. 권업모범장 사업 전개에서의 식민지 본국 중심성
2. 벼 품종의 변화 양상 2.1 벼 품종별 특성 2.2. 우량품종 보급 과정의 전개
3. 일제의 품종개량 사업의 결과 3.1. 우량품종 보급으로 인한 생산성의 변화 3.2. 전반적인 농사개량에서의 식민 지배 상황의 영향
Ⅲ.결론
Ⅰ.서론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한국 농업을 자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용했다. 이러한 특성은 일본 내 쌀 폭동 등의 사회적 상황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농사개량 사업의 결과 어느 부분 생산량 증대가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토지개량 사업에서의 시비법 발달 등과의 엇박자로 인해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도 했다. 본 글에서는 일제가 조선에 적용한 농업기술체계를 수도우량품종의 도입을 중심으로 알아봄으로써 일제의 조선 농업 정책의 성격을 탐구할 것이다.
이때 그 성격을 ‘추진 주체’와 ‘추진 대상’이 달랐던 식민 지배의 상황이 가져온 영향을 중심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국가의 정책은 추진 주체와 그 대상이 모두 해당 국가로 동일하지만, 이러한 동일성은 ‘식민 지배’라는 특수한 상황에 서 깨지게 된다. 권업모범장을 비롯한 일제의 농업기구 및 구체적인 정책에서 그 추진 주체는 식민지 본국인 일제였고, 추진 대상은 피식민국으로서의 조선이었다. 서술의 편의를 위해 이러한 어긋남을 ‘식민성’으로 표현할 것이지만, 식민성이라는 용어가 식민지적 억압의 의미보다는 타국의 지배를 받는 특수 상황이 초래한 주체-대상 간 어긋남의 의미임을 짚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식민 지배가 가져온 식민지 본국 중심적인 성격에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하되, 지나친 민족주의 담론의 경향에서는 탈피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식민지 본국으로서 일제는 자국의 요구에 맞추어 한국 농업구조를 재편할 필요성을 느끼는데, 이를 위해 추진한 농사개량 사업 중 하나가 벼의 우량품종 도입이다. ‘우량 품종’이란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재배해온 재래품종과 달리, 일본에서 試作 후 우수한 결과를 내는 품종을 골라 들여온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량품종의 도입은 앞서 언급했듯이 비료 증대 경향과 어긋나게 전개되어 오히려 생산성 정체를 초래하는 등, 일제의 목표 달성에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양상을 탐구하기 위해 우선 일제가 농업 정책을 기획하던 기구인 권업모범장의 기능을 중심으로 벼 품종의 도입이 이루어진 방식을 알아볼 것이다. 농사개량의 시험‧연구를 주도하던 권업모범장의 설립 및 운영에서의 성격은, 구체적인 사업의 성격에도 그대로 반영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우량품종 도입의 전개 양상과 그 요인, 그리고 전반적인 농사개량의 성격 측면에서도 일본과 조선 간 관계가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Ⅱ.본론
1. 권업모범장의 성격에 대한 고찰
1.1. 권업모범장 설립에서의 일제의 농업지배 의도
권업모범장은 조선 농업 정책의 기획과 농업 기술의 보급을 이끌고 나가는 역할을 수행한 기관이다. 식민지기 이전인 1906년 4월부터 통감부가 주도하여 창설되었고 식민지기에는 조선 총독부 산하로 들어간다. 이를 통해 당시 식민지 본국이던 일제의 농업 기술 체계를 식민지 조선에 들여옴으로써, 전통적인 조선의 농업 기술은 상실시키고 농업을 일본의 기술적인 지배 아래에 놓아서 식민 농업화하려는 태도가 보인다.*1) ‘권업모범장’이라는 명칭 자체도 조선 재래 농법에 기반을 두고 근대적인 농법을 ‘시험‧연구’하려는 것이 아닌, 일본의 근대화된 농법을 조선에 ‘모범으로서 권하려는’ 취지가 드러난다.*2)
또 권업모범장의 설립은 한국 농상공부의 농사시험장 설립 계획을 막고 설치한 것인데, 이는 1906년 4월 9일 개최되었던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제3회 협의회>에서 ‘(일본 정부는)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할 예정이다.’라며, ‘그런데 한국에 있어서도 동일의 계획이 있고 …(중략)… 일본 정부로 하여금 모범장을 설립하게 하고 명년도에 이르러 그것을 모두 한국 정부에 인도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묻는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정부에서 농사시험장 설립 시 농업 전반에서 전통적인 기술 체계를 바탕으로 농업에 대한 한국의 지배력이 강화될 것이었다. 따라서 일 본의 의도대로 조선을 식량 공급 기지화하는 것에 방해가 될 터이므로 농사시험장의 설립을 막았던 것이다.*3) 이에 대해 권업모범장의 개설을 한말 정부의 계획, 재원으로 이뤄졌으므로 한말 정부가 개설 주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는 점을 밝힌다.*4) 설령 그 렇다 하더라도 이후 권업모범장이 일제가 조선 농업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데에 이용되었다는 점은 여전하다.
권업모범장은 1906년 11월, 고종의 강한 요구로 한국 정부에 이양되었고 편제가 더 확대되었지만, 기존의 경영 방침을 변경하지 않는 조건이 붙어있을뿐더러 場長을 비롯한 주요 구성원은 거의 일본인들이었다. 즉 일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운영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경술국치 이후 권업모범장 등은 총독부 관할로 들어가며 식민지체제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기구들을 통해 일제는 최소의 비용을 투자해서 쌀의 생산량을 늘리고, 쌀의 품질을 향상하고자 했다. 따라서 권업모범장 및 종묘장 등의 기구를 통해서 일본의 농업 기술을 강제적으로 한국에 이식하는 방식을 통해 농업 기술의 개량을 꾀했다.*5)
1.2. 권업모범장 사업 전개에서의 식민지 본국 중심성
일제가 처음 권업모범장을 설치할 때의 목적은 크게, 시험‧조사 사업, 품종의 육성 배부, 지도‧장려 사업이 있었다. 이러한 사업들은 조선의 기후, 풍토, 농업사회 등의 요소에 관한 연구 없이 일본 농업 기술을 이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시험‧조사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펼쳤지만, 후에 비판을 거쳐 대폭 개편되기 이전까지 실질적으로 연구기관으로서의 성격은 갖추지 못했다. 1910년대의 초기 권업모범장은 품종 개량에 있어서 실질적인 연구보다도 장려와 지도 사업에만 치중했었다.*6)
권업모범장에서는 일본에서 이미 개발된 종자를 도입하여, 그 가운데에 한반도의 풍토에 적합한 것을 골라내는 식으로 신품종 도입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보급된 품종들 을 ‘우량품종’이라 한다.*7) 1912년 12월에 농업기술관회동에서 발표한 「미작에 관한 건」에서는, “우량품종의 보급에 시험을 거쳐 조선풍토에 적응된 품종을 보급하는 것이 1910년대 조선의 농업개량에 핵심임을 설명하고, 이어서 이러한 사명을 담당할 기관으로 권업모범장을 지적”한다.*8)
다만 일제 식민 지배 초기에는 아직 체계가 완전히 잡히지 않은 시험과 조사 작업이 이루어졌다면, 1914년 권업모범장의 대폭적인 개편 이후, 1910년대 중반 이후로는 더 체계화된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를 통해 1915년부터 정규 육종 사업을 시행하는 등, 식민지 조선에서의 농업 수탈을 위한 기반을 만들어 갔다.
그리고 1918년 8월, 일본 내 쌀값의 폭등과 쌀 매점매석에 대한 소문 등이 원인이 되어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시행되는 적극적인 농업 정책이 1920년의 조선산미증식계획이다. 1919년, 관제를 다시 제정하여 지방의 농사 개선 촉진, 우량품종의 보급 등에 도종묘장과 권업모범장이 중요한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적어도 1920년대 초반까지는 권업모범장의 본질은 최소의 비용으로 농사개량을 하는 방안으로서 일본의 선진 농업 기술을 그대로 도입하려는 것에 있었다. 그 후 1차 산미증식계획이 부진하게 끝나면서 일제는 우량품종의 육성과 같은 농사개량을 통해 쌀의 생산성을 향상하고자 권업모범장의 연구기관적인 성격을 더욱 강조한다.*9) 조선의 필요보다는 식민지 본국으로서의 일본의 필요에 맞게 변화되어 가는 모습이다.
주)
1) 김도형, 「勸業模範場의 식민지 농업지배」, 한국근현대사연구3, 한국근현대사학회, 1995, 141면.
2) 류정선, 「조선총독부의 밭작물 개량증식 정책」,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2,14면.
3) 김영진‧김상겸, 「한국 농사시험연구의 역사적 고찰 -권업모범장을 중심으로-」, 농업사연구9-1, 한국 농업사학회, 2010, 14면.
고등학생 때까지 배우는 교과서의 지나치게 '국뽕' 느낌나는 서술은 탈피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식민지 근대화론 쪽으로 향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한 글입니다. 부제의 단어 선택에서부터 느껴지지 않나요 ㅋㅋ..... 그래서 결과적으로 중립적 태도 유지에 성공적이었는지 어떤지는...잘 모르겠군요
Wuhwang-Cheongsimwon(牛黃淸心丸) is a Korean ‘Yak’ made of about 30 medicinal ingredients, including Wuhwang(a lump in a cow’s gallbladder caused by illness.) and ginseng, used for paralysis, epilepsy and convulsion.*1) 'Cheongsim(淸 心)' implies it is effective in lowering the heat in the heart and liver. The most common name is ‘Cheongsimhwan’ but to be exact, WuHuang-cheongsim‘hwan’ is an Chinese medicine while Wuhwang-chengsim‘won’ is Korean medicine, since the name was used in <Donguibogam>. The manufacturing methods of the two are also slightly different.
Wuhwang-Cheongsimwon is commonly used as a tranquilizer for tense moments such as important exams and interviews. Obtaining it is easy because it is an over-the-counter drug. According to the ‘IMS General Drug Sales Statistics’ from 2012 to 2016, sales of Wuhwang-Cheongsimwon ranked fourth in the overall general medicine market in 2016, showing a trend of growth every year.*2)
However, Cheongsimwon did not start out as such a medicine. The package box states that it is effective for disease such as high blood pressure, speech disorder, facial nerve paralysis, mental anxiety, nervousness et cetera. In other words, it cannot be regarded just as a simple tranquilizer. This can be a problem because even though Korean traditional Yak is from natural sources, it might be harmful to the body if taken incorrectly. Still, Cheongshimwon is perceived to be easier to access than the Western neurostabilizing drugs. This essay will examine how Cheongsimwon got such popularity in modern society.
In order to figure this out, we should first look at the characteristics of Cheongsimwon. We can learn perception of Cheongsimhwan in the past by looking at historical records. It was first recorded in <TaepyeongHyeMin Hwajegukbang> (1107), in which it is called as ‘WuHwang-chengsimwon’ or ‘Gukbang WuHwang-cheongsimwon’. It is said to treat symptoms such as ‘pung(風)’, stammering, heart-pounding, dizziness, sputum, and difficulty in controlling emotions. Cheongsimhwan's prescriptions are also recorded in books such as <Bojebonsabang> written by HeoSookmi in the mid-12th century Song Dynasty, <Dangyesimbup buyeo> published by BangGwang in 1536, and Gogumuigam published by GongSin during the Ming Dynasty. In <Bojebonsabang>, Cheongsimhwan is said to treat the heat in the chest caused by heat in the meridianm and is also used in treating thirst and nausea due to lingering fever. <Dangyesimbup>(1481) states that it has the effect of treating boils and sharp pains in the body. In the Ming Dynasty's <Dujin Seuisimbeop>, it says that Cheonsimhwan is also called as ‘Minssi-Wuhwang-hwan’ and it treats the heat of the heart and the confusion of the mind.
Later, Cheongsimhwan was introduced to Joseon and was accepted by medical books at that time, such as <Uibangyuchui>(1445), <Uirimchwalyo>(1635), <Donguibogam>(1610), <Unhaenapyak jungchibang>(1608), <Jejungshinpyeon>(1799), <Bangyakhappyeon>(1884). <Uirimchwalyo> cites <Dangyesimbup buyeo> and < Donguibogam> cites <Bojebonsabang> and <Gogumuigam> to explain Cheongsimhwan. In Donguibogam it is recorded in the "Pung" chapter and is said to be used when one becomes suddenly unconscious or mentally disturbed after a stroke. In Yi Jemma's <Donguisusaebowon>(1894), Cheongsimwon is said to treat ‘Taeeumin’ types who has severe phlegm, mental depression, and inability to keep his arms and legs properly.*3) According to Joseon dynasty’s sillok, in King Jungjong’s period, Cheongsiwon was regarded as a cure for seasonal epidemics.*4) In King Seonjo’s period, it was given to a person who had heart-throbbing, fever, and seizure.*5) There are many more articles on taking, or giving Cheongsimhwan in <TaejoSilok>, <YeongjoSilok>, <JeongjoSilok>, <GojongSilok>, <Ilseonglok>, and <SeungjeongwonIlgi>.*6)
The above documents show that Cheongsimhwan was widely used in Joseon. Traditionally, Cheongsimhwan was often used in situations of severe mental excitement, seizures, or paralysis, rather than general relaxationer of tension like nowadays. In other words, there had been a change in perception in terms of usage. What process did Cheongsimhwan go through for this change, and what was the cause?
First of all, we need to find out how general Korean Yak was incorporated into modern society. Korean medicine co-existed along with Western medicine, and this served as a background for Korean Yak to be widely spread afterwards. Then the pre-modern characteristics of Cheongsimwon had to be demolished, unless Cheongsimwon would not have fit as a ‘pharmaceutical’ in modern day’s strict regulations, but such issues were solved gradually. For example, since herbal medicines use natural plant products, securing uniformity of quality was a big problem. This was solved by having a regulated company prepare and distribute standardized and quality herbal medicines since May 1995. Also, Hanbang has been included in the National Medical Insurance since 1987, which means Hanuihak prescriptions using herb-extracts were also covered by the national insurance.7) Korean Yak and Hanbang got recognition by the government and were supported for active us, and the quality of the medicine was also managed.
Now the remaining question is, how did ‘Cheongshimwon’ become so popular among many other herbal medicines? Here's how it came to be sold as a modern pharmaceutical product. In 1925, Park Seongsu, who was a Hanuhak practitioner, founded the ‘Joseon Muyak’ company and in 1968, they started making ‘solpyo Wuhwang-Cheongsimwon’, the first commony-used Cheongsimwon. After that Cheongsimwon has been produced by various companies*8) The public became more interested in Cheongsimhwan as various companies came into market, and the market become bigger due to the people's interest in Cheongsimwon, like a reciprocal chain effect.
We can also focus on Cheongsimwon’s status before times of modernization. Park Jiwon’s YeolhaIlgi(1780) reveals the Qing Dynasty people's obsession on Cheongsimwon. As fake or low-grade Cheongsimhwan prevailed in China, real Cheongsimhwan was in short supply.*9) It was so popular in China that even unrealistic rumors about Cheongsimhwan’s magical powers spread throughout the country. Thus, when ambassadors came from Joseon, many Chinese approached to acquire Cheongsimwon. In <YeolhaIlgi>, Park Ji-won being deceived by an elderly Chinese woman and giving her Cheongsimwon.*10) This high status of Cheongsimwon may have contributed to it’s popularity in modern times. However, since 18th century is too far away from today, we cannot be sure if it has any meaningful correlation. In addition, since it is about China not Joseon, it may be inappropriate to explain the current popularization of Cheongsimwon in Korea. But still, we can at least treat this story as an indirect cause.
Next, let's look at the characteristics of modern society and it’s impact on Cheongsimwon. First, changes in materials have occurred, making Cheongsimwon safer and more ethical. The number of ingredients of vary in different books, but the key ingredient is Wuhwang and musk.*11) Because musk sparked controversy over animal rights, a substitute for musk called L-muscon is also used widely nowadays. Seogack(rhino’s horn) is also an important ingredient, but was banned by the World Organization for Animal Health. Therefore Buffalo horns are used these days. In addition, heavy metals such as Jusa and Seokhwang were also used, but because they contain mercury and arsenic, they aren’t used in medicine anymore.*12)
Secondly, the differences in materials lowered the preciousness of Cheongsimhwon. In 1762, when Jeongjo was sick, royal doctor BangTaeyeo made Cheongsimhwon for him. When King Yeongjo heard this he ordered to cut off Bang’s head. Luckily BangTaeyeo got help and saved his life, but this story shows that Cheongsimhwan was an strictly controlled drug.*13) But now the situation is very different from that of King Yeongjo. Combined with the nationalization of Korean Yak, the modern substitutes of materials made it possible to supply Cheongsimhwan at a lower price. The price is formed between 2,000won and 10000won depending on the pharmaceutical company and the quantity of Wuhwang.
Thirdly, the marketing&sales strategy is also noteworthy. The original Wuhwang-Cheongsimwon was sold as an spherical shaped pill, 2~3cm in diameter. It had to be chewed to swallow so the taste and the smell was strong, causing young people to dislike it. However, Kwangdong Pharmaceutical company entered the Cheongsimwon business in 1974 and released the ‘Wuhwang-Cheongsimwon suspension(form of liquid)’ in 1991, making it act fast and easy to drink. This caused young people to more willingly try Cheongsimwon. The fact that Kwangdong Pharmaceutical Co. was able to take over the Solpyo brand of Joseon Muyak also seems to be a positive result of Kwangdong Pharmaceutical’s marketing&sales strategy.*14)
To sum up, as seen in many historical records, the usage and recognition of Cheongsimwon was quite different from today's tranquilizer purpose. Cheongsimwon in the past had different uses, such as being used as a counter-measure for stroke or paralysis, and it was considered important and rare. In the Qing Dynasty, Cheongsimwon of Joseon was so popular that the ambassadors of Joseon took a few pills of Cheongsimwon with them. Due to this popularity, Cheongsimwon managed to maintain it’s position as a major Korean Yak. The fact that Cheongsimwon appeared in various royal history records shows the high status of Cheongsimwon.
In that way Cheongsimwon consolidated it’s position in the pre-modern era. In the modern age, Cheongsimwon became popularized by changed characteristics. First of all, materials such as musk have been replaced with safer and more ethical materials. This caused the price to be lower, only 2,000 to 10,000won, making it easy for anyone to get it. Also, the release of liquid-type drugs made it easier for young people to access Cheongsimwon. The fact that it treats serious diseases such as seizure, but is also cheap and convenient to drink, may have led to the expectation that Cheongsimhwan is an "neurostabilizer" that anyone can easily purchase and use.
As such, Cheongsimwon was able to make appropriate changes to adapt to modern times and the source of this change was in both the historical characteristics of Cheongsimhwan and the comprehensive social aspects of modern times.
annotation)
1)『표준국어대사전』 ‘우황청심원’
2)오영택‧오현묵‧김서우‧김원용‧손창규‧조정효, 「우황청심원의 고문헌기록 및 실험적 연구결과 분석을 통 한 임상응용 확대의 필요성 고찰」, 惠和醫學26.1, 대전대학교 한의학연구소, 2017, p.7.
조선 시대 궁궐에서 사용되는 우물은 ‘어정’이라 불리며, 필요에 따라 관련 관청에서 이용하기 쉬운 위치에 계획적으로 설치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그러한 계획적 설치가 오늘날의 경영과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도 합리적인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물은 식수 및 기타 일상생활에 중요한 요소였기에 물의 공급이 원활하게끔 어정이 설치되어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조선 시대 궁궐 건축의 기교를 확인하는 길이 될 것이다. 다른 궁궐이 아닌 창덕궁, 창경궁을 선택한 것은 동궐도를 통하여 우물의 위치 파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적용할 방법은 이진정수계획법이며, 이는 ‘우물을 설치할지, 설치하지 않을지’의 의사결정을 1 또는 0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방법은 우선 동궐도를 통해 궁궐 내 어정을 전부 파악하여 번호를 매기고 우물을 사용하는 건물들의 위치 또한 찾을 것이다. 이어서 각각의 건물에서 각각의 우물까지의 거리를 대략 측정하고, 궁녀, 즉 성인 여성의 평균적인 걸음 속도로 해당 건물에서 우물까지 걸리는 시간을 알아볼 것이다. 조건을 만족시키는데 필요한 우물 개수의 최소화가 목적식으로 설정될 것이다. 이때 역사학적 분석을 먼저 수행한 뒤 경영과학적 접근을 시도할 것이지만, 본 보고서에서는 역사학적 분석 과정에 관한 서술은 최소화하기로 한다.
Ⅱ. 본론
동궐도에 그려진 우물을 전부 표시하자 총 25까지 임의로 번호를 붙일 수 있었다. 우물들은 궁궐 전반에 분포하고 있지만 몇몇 구역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어서, 물의 사용은 왕실 구성원의 생활 공간, 궁녀의 일터, 각신들의 업무 공간에서 많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가정하여 궁궐 내에서 물의 사용이 잦을 공간을 같은 지도에 표시해 보았다. 궐내각사, 대보단, 만수전 터, 수정전, 대조전, 수라간, 생과방, 소주방, 사알방, 낙선재, 통명 전 터, 양화당, 환경전, 내사복의 14개 건물 또는 건물터가 표시되었다. <그림 1>에서 빨간 원은 우물, 파란 사각형은 건물을 표시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각각의 우물에서 각각의 건물까지의 거리를 대략적으로 구하였다. 이는 동궐도를 기준으로 하여 우물과 건물의 직선거리를 잰 후, 현대 지도와의 비교를 통해 동궐도의 축척을 계산하여 실제 거리로 환산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실제로 사람이 걸어가는 경우의 거리가 아닌 직선거리로 한 이유는 동궐도에는 궁궐 나인들이 이용하였을 통로와 문이 자세히 표시되어있지 않아 정확한 경로 파악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 걸어갔을 경로의 거리 측정은 오히려 부정확한 결괏값을 불러올 수 있기에 어느 정도 현실과의 오차가 있더라도 ‘직선거리’로 통일하는 방안을 선택하였다.
편의상 건물명은 실제 명칭이 아닌 임의로 붙인 번호를 사용하였으며 해당 번호는 그림 2에 표기하였다. 부록의 <표 1>은 가장 가까운 우물과 건물 간 거리를 0.5로 설정했을 때의 상대적 거릿값이다. 모바일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여 직선거리를 확인한 결과 표1에서의 1은 실제로는 약 35m로 계산된다. 이를 반영하여 표에 값을 다시 채워 넣으면 <표 2>와 같다. 그리고 이를 성인 여성의 걸음인 시속 4km(분속 66.7m)를 기준으로 하여 각 거리를 이동하는 시간으로 환산하면 <표 3>과 같다.
<표 1> : 건물과 우물 간 상대적 거리<표 2> : 건물과 우물 간 실제 거리(m)<표 3> : 건물과 우물 간 시간 거리(분)
이를 이용하여 이진정수계획법 모형을 구성하면 목적식은 필요한 우물 개수의 최소화이다. 우물 건설에 필요한 비용을 알았다면 비용의 최소화로 두어도 좋겠지만, 우물 건설 비용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우물 건설 개수로 대신하는 것이다. 의사결정변수는 우물의 존재 여부이며, 제약조건은 각 건물마다 우물이 적어도 두 개는 n분 내의 거리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이 있다. n은 1, 3, 5를 각각 넣어 계산해보고 필요할 경우 추가적인 계산도 시행할 것이다. n을 하나로 정하여 풀지 않는 이유는, 직선거리임을 고려하여 시간적인 제약조건을 강하게 잡았으나 다소 임의적인 설정이므로 여러 제약조건의 경우를 고려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스프레드시트로 변환하여 계산해본 결과,
① 건물당 편도 5분 이내인 우물이 적어도 2개 이상 있어야 하는 경우, 우물 7, 8의 2개만으로도 조건이 만족되었다. 이 경우 최소 도달시간의 평균은 2.51분이었다.
② 건물당 편도 3분 이내인 우물이 적어도 2개 이상 있어야 하는 경우, 우물 3, 5, 7, 16, 23의 5개가 필요했다. 참고로 이때의 우물까지의 최소 도달시간의 평균은 1.71분이었다.
③ 건물당 편도 1분 이내인 우물이 적어도 2개 이상 있어야 하는 경우는 최적해를 찾을 수 없다고 나온다. 1.5분, 2분의 경우를 시도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해 찾기 프로그램에서 1분의 제약조건 충족에 그나마 가까운 해를 찾은 결과를 보면 우물 3, 5, 7, 8, 9, 13, 14, 16, 17, 21, 22의 11개가 필요하였고 이때 건물 1, 2는 1분 내 도달 가능한 우물이 각각 0개, 건물 3, 4, 9는 각각 1개로 제약조건에 어긋남을 알 수 있었다.
대수모형 및 스프레트시트 계산
위의 세 경우가 시사하는 바는 우선 직선거리 기준으로 도달시간이 5분, 3분인 우물이 2개 이상 있어야 한다는 조건은 여유롭게 만족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부정적으로 해석하면 궁궐 건축 당시 경영과학적 접근법에 어긋나게 가장 효율적인 우물 건축을 추구하지 않고 무조건 우물을 많이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계획적인 건축이 이뤄졌으나 단지 우물을 계획할 당시의 조건들이 직선거리 3분, 5분보다 더 강화된 제약조건 하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직선거리 3분, 5분, 걸어가는 거리로 하면 대략 2배가 걸린다고 가정할 경우 편도 6분, 10분 정도의 긴 거리이므로 충분히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또는, 우물 제작 비용이 예상과 달리 매우 저렴할 경우 경영과학적 방법론을 이용하여 가장 효율적인 제작을 계산하는 것보다 그러한 계산을 생략하고 우물을 무조건 많이 만드는 것이 오히려 경제적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이는 우물 건축의 비용을 지나치게 작게 가정하고 있으므로 현실적인 해석은 아니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왕실을 상징하는 건축인 궁궐, 왕릉 등은 조선 토목 기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장소이므로, 비록 부정적인 해석도 가능하더라도 후자의 긍정적인 해석처럼 계획적인 건축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할 여지가 충분한 경우 그 계획성을 인정하는 것이 옳을 테다. 무작정 우물을 많이만 만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후술할 ③의 해석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편도 1분 이내인 우물이 2개 이상 있어야 하는 경우는 우물 11개를 세워도 조건 충족이 되지 않는 것은, 앞의 조건들이 일률적으로 적용된 것이 아니라 건물마다 달랐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예컨대 ③에서의 11개의 우물을 건설할 경우, 건물 1, 2, 3, 4, 9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지만, 만약 3분 내로 도달 가능한 우물로 범위를 넓힌다면 해당 건물들도 11개의 우물 중에 2개 이상씩 조건이 충족된다. 즉, 1, 2, 3, 4, 9를 제외한 건물들은 1분 내 도달 우물이 2개이고, 1, 2, 3, 3, 9의 건물은 3분 내 도달 우물이 2개라는 상황까지는 충족된다. 실제 현실에서는 ‘모든 건물이 1분 내 도달’이라는 일률적인 조건을 적용하기보다는 '되도록 1분 내 도달을 추구하되, 상황에 따라 3분 내 도달도 허용’ 정도의 완화된 조건을 적용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Ⅲ. 결론
본 연구의 의의는 조선 창덕궁, 창경궁의 궁궐 건축의 계획성을 평가해보는 데에 경영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했다는 점이다. 분석 결과, 우물의 배치는 각 건물에서 직선거리 3분에 위치하는 것은 여유롭게 충족하였고, 건물의 약 2/3는 직선거리 1분 이내에 우물 2개가 있고, 나머지 1/3 또한 적어도 직선거리 3분 이내에 우물 2개가 있는 상황을 충족시켰다. 이를 통해 궁궐 건축이 우물을 무조건 많이 설치했다거나 단순히 필요한 건물마다 몇 개씩 할당하기보다는 건물들과의 거리를 고려하여 나름 효율적인 설치를 시도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생활에 필수적인 물의 공급처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어정, 즉 우물과, 물을 자주 사용했을 건물 사이의 거리를 파악하여 필요한 우물 개수를 탐구하는 활동은 기존에 역사학계에서 진행했던 우물의 역사적 함의에 관한 연구를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계점도 존재한다. 미처 파악하지 못한 물 사용 건물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 경우 스프레드시트 상에 건물을 추가하여 모형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자료가 공식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직접 측정한 것을 사용하여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점이 있다. 같은 맥락으로, 실제 걸어간 경로를 동궐도 상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한계로 불가피하게 직선거리를 구하는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에 건물과 우물 간 거리가 실제보다 거의 1/2 정도로 짧게 나왔다는 점이 있다. 더욱 정확한 연구를 위해서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답사를 비롯한 자세한 탐구를 통해 실제 궁녀들의 우물 사용 경로 데이터 수집이 필요할 것이다.
신문과 서유견문의 서양문물 소개에서의 차이는 간행한 사람의 특성과 주변 상황이 반영된 결과물일 것이다. 유길준의 상황 및 목적을 살펴보고자, 먼저 서유견문을 쓸 때 참고한 책을 확인하자면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으로 후쿠자와의 책을 다수 이용했다. 후쿠자와의 『서양사정』과 특히 유사한 부분이 많으며, 『학문의 권장』과 『문명론의 개략』 등이 그 사례이다. 해당 책들은 일본 문명개화론자로서의 주장을 담고 있는 책이며, 서유견문의 논조와 유사하다. 다만 유길준은 후쿠자와의 책 뿐 아니라 일본과 미국 유학 생활에서 접한 서적들로부터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헨리 휘튼의 국제법 저서의 중국어 번역본인 『만국공법』, 헨리 포셋의 『부국책』, 가토 히로유키의 『입헌정체략』, 오웬 데니의 『청한론』 등을 참고하면서 작성하였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해당 책들은 서유럽 국제법과 근대 경제학 정책을 소개하고 메이지 일본의 서양 사상 수용을 강조하는 내용을 가졌으며, 서양의 법, 경제, 제도 및 정치 사상을 중국과 조선에게 알린다. 또, 『서유견문』의 19편과 20편은 세계여행 안내서인 『만국명소도회』 1~3권 내용에 유길준 본인의 경험을 더하여 영국과 미국에 대해 서술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18)
『서유견문』을 집필할 때의 유길준은 당대 최신 저술들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서유견문』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의 여행기를 참고하였다고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그 도서들로부터 획득한 지식을 서유견문 안에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조선이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하였으며, 자신이 참고한 자료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하나하나 밝히기보다는 그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서유견문을 통해 정리하고 알리는 데에 의도가 있었다.*19)
즉, 서유견문이 서양문물 소개에 있어서 구체적 국가 자강 방안보다는 개화사상에 대한 인식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경향성을 보이는 이유의 한 가지는 유길준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으로서 그의 문명개화론적인 사상을 깊이 받아들였으며, 그 영향 하에서 서양 유학 과정에서도 구체적 정책론보다는 보다 추상적인 제도사상론의 책들을 참고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유길준의 다른 저술들을 서유견문과 비교해봄으로써 그 서술 배경을 파악하는 것 또한 의미있을 것이다.
『파란쇠망전사』에서 유길준은 백성들의 정치참여는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대세라고 인식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서유견문의 3편 ‘我邦의 권리’에서는 “군주는 일국의 최상위의 지위와 권력을 가진 자로서 그 인민이 군주를 服事하고 그 정부를 承順해야 한다”(98면)라고 보면서 그 존재를 국가의 정치체제에서 배제할 수 없는 당연한 존재로 인정했다. 영국식의 입헌군주정을 가장 이상적으로 간주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20)
유길준이 1883년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경쟁론」에서는 생존경쟁,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을 조선에 처음 도입하였는데, 개화‧문명이란 용어보다는 ‘文明不開’, ‘未明不開’등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신체, 생명, 재산권의 보호와 서로 힘쓰는 것을 통해 사회가 진보한다는 의미를 담고자 했다.*21) 이는 서유견문의 4편의 ‘인간 세상의 경쟁’과 거의 유사한 내용이다.
해당 내용들을 통해 유길준의 개화사상 자체는 타 저술과 서유견문 속 서술이 얽혀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유길준의 사상이 서유견문이라는 백과사전적 개화사상서의 특성과 결합하여, 기본적으로 개화라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조선 백성이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사상적 가치들을 강조하며 기초를 다지는 방식으로 개화를 이루려는 의도가 보인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Ⅱ에서 살펴본 서유견문의 시대성은 사실은 저자 유길준의 이러한 특성이, 서유견문의 서양문물 소개라는 결과로 발현되면서 나타났다고 추론할 수 있을 테다.
Ⅴ.결론
서유견문은 서양문물 소개에 있어서,현재 조선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지를 풀어낸 글이기는 하지만 이를 직접적인 대안 제시를 통해 이야기하는 시무책은 아니다.그보다는 내용에서도 서술 방식에서도,새로운 개념과 이론들을 들여오며‘전반적인 개화 사상의 기반 마련 작업’을 시행하는 경향이 드러난다.이는 신문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두드러지게 확인할 수 있었다.
서유견문이 여러 사상적,제도적,인식적 기반을 서술할 때 상정하던 사회는 조선의 군주정 현실이 달랐고,서유견문에는 과거부터 존재하던 조선 사회의 폐단이 반영되어있지 않다는 점이 있었다.京主人의 구독료 수취 횡포 등이 여기에 속한다.또 서유견문은 여러 기술을‘새로운 것’으로서 소개하고 있음에도,타 주제,예컨대 문화를 소개할 때에는 이미 해당 기술 발전이 이루어진 국가를 상정하는 듯이 이야기한다.이는 다시 해석하면 서유견문은 기존 조선 사회에 대한 엄밀한 분석을 통해 이를 해결하는 구체적 정책을 내놓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보다 전체적인 관점에서의 개화를 들여옴으로써 조선인의 인식적 지평을 넓히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보다 구체적으로는지리,권리,정부의 주제가 순서와 분량 면에서 중요도가 부여되고 있었으며14편 후반부의‘개화의 등급’은 책의 결론 부분으로서 유길준의 개화에 대한 문명개화론적인 관점을 드러낸다.그리고 한성순보‧주보에서 분량상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군사,산업,재정 분야는 한 데에 묶이지 않고 부록 등에 분산되어 등장한다는 점,그리고 분량적으로도 적다는 점에서 유길준의 중요도 파악에서 뒤로 밀려났음을 추론할 수 있다.그렇더라도 각각의 주제에 대한 작성에서는 다양성과 상세함이 보이므로,전반적으로 국가의 성장을 위한 요소들을 직접적으로 주장하기보다는 서유견문의 특성인‘개화의 큰 틀 형성’에 초점을 맞춘 시무책으로서의 집필 의도가 드러난다.
본 연구의 의의는,기존에 단순히 유길준의 정치사상을 파악하는 데에만 쓰이며 정치적 표현을 한 단어씩 뜯어서 연구되고,또 어휘 중심으로 근대적인 변화 양상이 연구되었던 것과 달리‘서유견문’이라는 텍스트를 전반적으로 보면서‘서양문물의 소개’라는 기본적 형태를 어떤 식으로 달성하는가 살펴보았다는 점에 있다.또‘책’으로서의 특성을 감안하는 동시에 책이기에 나타나는 특징들을 더 잘 확인하고자,서양문물 소개의 또다른 대표적 매체인‘신문’을 비교에 활용했다는 특징이 있다.다만 본 연구의 한계 역시 신문을 비교로 활용하였기에 발생하는데, ‘서유견문’에 대한 인식이 신문 분석의 대응에 머무르고,실제 역사적 사건들로 더 넓게 확장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주)
18)최덕수, 유길준의 서유견문, 기록과사람인40, 2017, 43-44면.
19)최덕수, 위의글, 44면.
20)김석근, 조진만, 19세기 말 조선의 ‘franchise’(參政權) 개념에 대한 인식과 수용, 한국정치학회보35.2, 2001, 53면.
한성순보와 주보의 국외 소식 기사는 대외정세에 대한 것과 근대문물에 대한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서양문물’에 추상적 요인도 포함을 시키기로 서론에서 정의했으므로 대외정세에 대한 기사도 연구에 포함하기로 한다. 당시 정부가 입수한 국제자료를 선별하여 수록한 이 기사들은 순보와 주보에서 조금의 차이가 있기에 이를 밝혀 적는 것이 합당할 테다.
우선 대외정세를 다룬 기사는, 「순보」에서는 기본적인 세계 지리정보, 청 중심 전통적 동아시아 국제 질서 변화에 초점을 맞춘 반면 「주보」에서는 청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 서구열강의 구도를 파악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열강과 약소국 관계에 대한 현실적 인식을 돕고 그 속에서 조선이 약소국으로서 독립국으로 생존하는 것에 대한 정보들이 실렸다.*13)또 「순보」에는 약소국이 강대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이 나와있고, 「주보」에는 강대국의 약소국 식민지화를 다룬다. 군사 기사는 「순보」는 주로 서구의 군사력 동향을 다루고, 「주보」는 열강의 군사력 및 그 확장, 특히 일본의 군사력 확장을 다루는데 해군 확장 소식의 빈도가 높다. 또 「순보」에서는 통사의 중요성을 막연히 강조하는데 「주보」에서는 주변국인 러시아, 청, 일본 등의 무역 현황을 다룬다. 철도 기사는 「순보」에서는 열강의 선진적 철도 사업, 철도 부설의 필요성을 말한다면 「주보」에서는 청과 일본의 철도 부설사업을 더 보고한다.*14) 즉 정리하자면 순보에 비해 주보는 일반적인 개화 지식의 전달에서 벗어나, 보다 조선의 특수한 사정에 맞고 구체적으로 얽힌 주변국에 집중된 정보가 전해졌다. 열강들로부터 위협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보이는 것은 공통적이다.
근대문물 관련 기사는, 「순보」, 「주보」 모두 개화정책의 핵심 분야인 군사, 산업, 재정, 교통, 통신, 통상 관련을 두루 수록했다. 다만 「주보」에서는 근대문물 소개 차원의 다양한 부문의 기사는 줄고, 재정 확보 부문에서는 회사‧제조업 소개기사보다는 광산 관련 기사에 집중한다. 신문물을 두루 알리는 것에서, 현재의 정책에서 주력하는 특정 분야에 집중하였다. 또 군사 부분 설명이 주가 되어 외국기사 중 순보에서는 6.3%, 주보에서는 12.6%를 차지했다. 그 뒤로는 순보는 산업(4.4%), 재정(3.7%), 교통(3.3%) 순서였으며. 주보는 교통(5.6%), 산업(5%),재정(3.8%) 순서였다. 참고로 한성주보는 청불전쟁 관련 기사가 48.8%로 압도적으로 많다.*15)이를 통해, 한성순보와 주보는 ‘신문’이라는 특성에 부합하게 당시의 시급한 일, 그리고 조선의 현재의 위치를 지켜내고자 하는 목표가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업과 재정, 교통은 곧 국가의 힘을 키우기 위한 개화의 기반을 닦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유견문에서의 서양문물 소개는 어떠할까. 서유견문의 목차는 총 20편으로, 서론인 1, 2편은 서론, 3편 ‘邦國의 權利’부터 14편 ‘商賈의 大道’까지는 본론, 14편 ‘改化의 等級’은 결론, 15~20편은 보론이다. 각 주제에 대한 유길준의 중요도 인식을 살펴보고자 ‘분량’과 ‘순서’에 주목했다.
순서상 앞에 오는 것에 중요도를 두었을 것이라고 전제하여 앞 단원들을 살펴보면, 1, 2편은 세계 지리를 다루면서 1편은 지구 세계의 개론, 6대주의 구역, 나라의 구별, 세계의 산에 대해 이야기하고 2편에서는 세계의 바다, 강, 호수, 인종, 물산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그 뒤에 이어지는 3, 4편은 권리에 대한 내용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듯한데, 3편은 나라의 권리와 국민의 교육을 다룬다. 이때 ‘교육’ 챕터는, 구체적인 교육 제도나 서양식 교육의 양상 소개 등이 아니라, 나라의 존망에 있어서 국민교육이 가지는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단원이다. 4편은 국민의 권리와 인간 세상의 경쟁을 다루는데, 여기서 경쟁은 국민들이 각자의 길에 힘쓰면서도 모두 합하여 의지하는, ‘훌륭한 경지에 나아가려는 勉勵’(134면)를 가리킨다. 5, 6편에서는 정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5편은 정부의 시초와 정부의 종류, 정부의 정치 제도를 다루고, 6편에서는 정부의 직분에 대해 이야기한다. 각 편의 분량은 대략 25페이지 정도로 유사하게 맞처져 있다. 따라서 위의 지리, 권리, 정부의 주제가 각각 2편씩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타 주제 비해 순서뿐 아니라 분량에서도 앞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해당 요소들에 대해 유길준이 부여한 중요성이 크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3, 4편의 경우 포괄적으로 개화된 국가로서의 정치 사상 및 국민 태도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묶을 수는 있지만, 타 챕터와 달리 명시적인 하나의 제재로 묶기는 어렵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또 14편 후반부의 ‘개화의 등급’도 책의 결론 부분이라는 점에서 중요할 것이다. 해당 챕터에서는 ‘아직 개화하지 않은 자’, ’반쯤 개화한 자’, ‘개화한 자’로 등급을 나누어 각각에 대해 이야기하고,(394면) 또 이와 관련된 개화에 대한 태도로서 ‘개화의 주인’, ‘개화의 손님’, ‘개화의 노예’를 언급한다(396면). 개화의 신기함과 그 근본은 예와 요즘이 동일하지만, 조선의 후배들이 옛것을 윤색하지 못하는 것을 문제 삼으면서 마무리된다.(402면)
그렇다면 한성순보‧ 주보에서 분량상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군사, 산업, 재정 분야가 서유견문에서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문의 해당 내용에 대한 주목은, 열강의 위협을 실감하던 상황 속 당장의 위협에 대처하고 조선의 국력을 키워 장기적으로도 국제 정세에서 살아남기 위한 목적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판단했었다. 서유견문에서의 서술을 보면, 군사에 대한 내용은 9편 후반부의 군대를 양성하는 제도, 그리고 13편 중반부의 서양 군제의 내력에 대한 내용이 있다. 전자는 군사의 방비로서 중요성, 그리고 군사를 양성하고 운영하는 법과 세계 각국의 군사와 군함의 수를 다루고 있고, 후자는 1300년대에 총이 처음 나오고서 총기술이 점차 발달하다가 이제 나폴레옹의 군제를 따르게 된 것에 대한 서술이다. 산업의 경우에는, 부록에 해당하는 18편에서 증기기관, 와트의 약전, 기차, 기선, 전신기, 전화기 등의 기술과 회사에 대한 내용이 있다. 각각의 주제에 대해서 그 모습과 방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회사’ 부분을 제외하고는 이를 조선의 발전과 직접적으로 연결짓지 않고 있다. 재정의 경우에는 7, 8편에서 다뤄졌는데, 7편에는 세금 거두는 법규, 납세의 의무, 8편에는 세금이 쓰이는 일들, 정부에서 국채를 모집하여 사용하는 까닭에 대한 것이 나와있었다. 또 10편에 화폐에 대한 설명에서도, 정부의 역할이 소개되어 ‘재정’에 넣을 수 있을 듯하다. 이처럼 한성순보와 주보에서 주목되던 내용은 한 데에 묶이지 않고 부록 등에 분산되어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분량적으로도 적다는 점에서 유길준의 중요도 파악에서 뒤로 밀려났음을 추론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각각의 주제에 대한 작성에서는 다양성과 상세함이 보이므로, 국가 개혁을 위한 시무책으로서의 집필 의도가 드러난다.
2. 서유견문의 서양문물 소개 특성의 함의
우선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 특성을 살펴보면, 서유견문의 서론으로서 순서상으로도, 분량상으로도 압도적인 ‘지리’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유길준이 일본 유학 후에 쓴 「세계대세론」에 비해 미국까지 유학을 하고 쓴 「서유견문」에서는 산, 강, 바다, 나라 등의 이름 그리고 인종, 제도의 영어 발음까지, 상세하고 체계적으로 제시되었다. 1편과 2편의 지리 서술의 공통점은 두 챕터 다 뒤쪽으로 갈수록 부분화되고 소규모화된다는 것이다. 1편에서 ‘태양계, 지구, 동·서 반구, 6대주, 국가, 산’의 순서였다면 2편에서는 ‘대양, 강, 호수, 인종과 물산’의 순서였다. 이렇듯 소분류로 나아가는 진행은 세계적인 시각을 전하면서도, ‘그 속의 방국으로서의’ 조선을 인지하게끔 한다.*16)이러한 지리 서술은 개화를 위한 기초적인 지식을 펼쳐놓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 지식을 먼저 주지 않고서는 서양의 문물제도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가 있다, 유길준 스스로도 세계지리서인 위원(魏源)의 「해국도지」를 읽음으로써 근대화의 시각을 얻었다.*17)여기에서 신문들과의 공통점이자 차이점이 드러난다. 한성순보와 주보에서는 기초적인 지식으로서 실질적인 군사, 산업, 재정의 내용이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서유견문에서는 당시의 폐쇄적인 세계 인식을 깨기 위해 서양 국가와 위치와 인종, 산물 등 기본적인 지리적 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Ⅱ에서 보았듯이 실제 조선의 정치적 현실을 담아내는 것을 주된 목표로 하지 않았던 서유견문의 시대성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서유견문은 전반적으로 국가의 성장을 위한 요소들을 직접적으로 주장하기보다는 개화의 큰 틀을 형성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지리 서술 역시 그 일환일 것이다.
또한 서유견문은 근대화의 기본적인 기반으로서 사상적인 내용과 정부에 대해 다루는 내용이 지리 바로 뒤에 오며 그 분량도 타 주제에 비해 많다. 그리고 군사, 산업, 재정에 대해 다루는 것이 신문보다 작고 한 단원이 아닌 여러 편에 산개된 형태이다. 그 셋 중에는 재정의 비중이 많다, 이는 어떤 함의가 있을까. 한성순보와 주보에 비해 서유견문에서는 근대화를 위한 기본적 인식의 틀 정립을 위한 세계적 지리 인식과 정치 사상적 개념들이 주목되었고, 신문과 마찬가지로 군사, 산업, 재정의 개혁을 위한 서술이 이루어졌으나 이를 특별히 더 중요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위에서 내용적인 측면을 살펴보았다면,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보다 구체적인 서술 방식 및 어조이다. 서유견문의 특징으로는 의미의 새로운 정의, 그리고 ‘한 나라를 비유하자면 한 집과도 같아’(85면) 등의 비유적인 표현, 특정 서양 학자의 이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의견을 소개하면서 ‘서양 학자들은’이라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 등이 있다. 즉 서술 방식과 어조에 있어서, 현재 조선의 시국에 대한 직접적 거론과 주변국의 현 동향에 대한 분석을 담은 시무책이 아니다. 새로운 개념을 들여온다는 입장에서 그 개념의 정의내리기 작업부터 수행하고, 포괄적 이론들을 들여오며 전반적인 개화사상의 기틀을 세운다. 이는 내용 구성 측면의 함의와 맞물린다.
Ⅲ을 위한 신문과의 비교 작업에 앞서 먼저 서유견문 자체의 시대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서유견문은 유길준이 귀국 후 한규설의 집에 연금된 상태에서 1886~9년에 집필하여 95년에 출간한 서적이다. 유길준은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서 일본에 가서 당시 유명한 문명개화론자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게이오의숙에 입학했다. 이후 그는 1883년 9월 보빙사로 미국에 파견되어 유학 생활을 하며 서유견문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이듬해 9월에 귀국 명령이 내려졌고, 1885년 12월에 귀국하고서 한규설의 집에 연금되었다. 그러나 비교적 자유로운 집필 활동이 가능하여 약 4년간 서유견문을 집필하고 1890년에 초고를 고종에게 바쳤다. 1892년에 이르러서야 연금에서 풀려난 유길준은 갑오개혁 후 일본 파견 보빙사에 수행원으로 참여하였고 일본에 갔을 때 후쿠자와 유키치가 운영하던 도쿄 교순사에서 1895년에 서유견문을 출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집필, 출간된 서유견문은 유길준이 생각한 이상적인 개화의 이야기가 담긴 책으로 일종의 이론서로서의 성격이 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문물소개서이기에, 서양문물에 대한 긍정적 시각이 기본적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아예 이상적, 비현실적인 내용만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 서유견문 속 정치, 문화 등의 많은 서술은 이미 서양에서 시행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는 서양에서의 상황이었을 뿐, 개항과 개화가 이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선의 현실과는 꽤나 차이가 있는 건 당연했다. 이러한 현실의 차이, 그리고 신문과 책이라는 매체의 종류의 차이는 서술의 방식에도 영향을 끼칠 것 역시 당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어지는 절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차이가 나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이를 확인하는 이유는, Ⅲ에서의 신문과 서유견문의 서양문물 소개 양상 비교가 공정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둘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인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 연구에서는 서유견문과 한성순보‧주보의 비교를 통하여 드러나는 차이점을 한성순보의 한계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유견문에 대해 알아보는 도구로 삼을 것이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서유견문이 당시 정치 사회 문화와 어떻게, 얼마나 ‘차이’가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2. 서유견문 속 신문 서술과 한성 순보‧주보 비교
서유견문의 17편 ‘新聞紙’ 단원에서 바람직하게 여기는 신문의 요건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는 기사의 내용 측면에서 조정 및 민간 비판, 여론 수렴‧국민 요구 전달, 농업 상업에 대한 업무를 널리 알리고, 군사, 학술 등을 다뤄야 하며, 법률이나 기계 등 주제의 전문성을 갖춘 글, 그리고 특정 독자층, 예컨대 여성 독자층의 집중화된 글도 나타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용이 상업의 현황, 물가의 등락을 알리는 데에 그치고 조정의 정치 법령이 잘 되었다거나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실리지 않는 신문은 ‘적막하다‘고 표현한다.(458면) 반면 한성순보‧주보는 조보를 자료원으로 하여, 대부분의 기사가 조보의 내용과 체재를 많이 따른다. 구체적으로 보면 순보 창간호의 국내기사는 지방관의 보고인 장계, 중앙관서에서 올린 건의, 국왕의 동정 기사가 모두 15건이었고 순보 제2호에서는 각도의 관찰사 및 암행어사가 보낸 보고서, 상소문, 국왕의 幸行, 영사들의 입경 소식 등이 게재되어있었다. 즉, 내용 구성 면에서 조보의 성격이 강했음을 확인 가능하다.*1)다만 국내기사가 조보의 성격을 강하게 띠긴 했으나 비중은 외국기사가 높았다. 한성순보는 세계 속의 방위‧鎭浸‧政令‧법도‧재정‧기계‧빈부‧飢饟‧인품의 선악‧물가의 고저 등을 정확히 밝히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2)이러한 외국기사를 적을 때, 총 외국기사 1,150건 중 571건이 중국의 정기간행물을 원자료로 사용했고 홍콩‧베트남을 출처로 한 것을 포함하면 중국 측 정보가 694개였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 입수하는 정보는 93건으로 비교적 소수였다.*3) 이처럼 중국 중심의 외국기사 수집이었기에, 청불전쟁의 발단, 전개양상, 청조의 대응방식에 주목하는 기사가 많았다. 다만 주보 시기에 가면 일본 측에서 얻는 자료도 늘어난다.*4)
두 번째로는 신문 보도의 신속성이다. 서유견문에서는 영국 정부의 아침 회의 내용이 오후에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까지도 전해진 사례를 제시하며 외국 신문의 신속성을 강조한며, ‘여러 신문사들이 빨리 보도하기를 다투고, 구독하는 자들도 전파되는 사실을 빨리 알아야 즐겁게 생각한다’고 말한다.(461면) 반면 한성순보‧주보의 경우, 순보 제1호에는 기사의 날짜도 분명히 명시되지 않았고, 그나마 제2호부터는 날짜가 분명히 명시되는 기사가 대다수를 차지하였으나 중국 신문의 원 기사와는 약 두 달간의 시차가 있었다. 점차 시차가 줄고 마지막에는 시차가 한 달이 안 되기는 하지만, 이는 한성순보가 정해진 날짜보다 지연 발간되었을 가능성이 있기에 신속성 향상의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음력 6월 11일자 한성순보 29호에 음력 6월 6일에서 15일 ‘申報’의 기사들이 대거 실린 것이 지연 발간의 상황을 보여준다.*5)
세 번째로는 신문의 대중 인기 및 판매 정도에 대한 것이다. 서유견문은 ‘신문을 사보는 자가 있은 다음에야 신문을 판매할 수 있으니, 이를 미루어 본다면 신문도 상업의 한 가지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서양 국가들에서 신문을 활발히 판매하는 양상,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여 광고료를 받는 방식도 소개한다. 반면 한성순보에서는 창간 시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고문으로 참여하자 일부 친청 보수세력 중심으로 서양과 일본에 우호적이라며 반발이 일었고, 갑신정변 때 박문국이 불타서 폐간된 것도 그러한 반감이 일부 작용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1888년 7월 14일 박문국이 경영난 등으로 교섭아문에 통합되며 한성주보가 폐간된 것 역시, 신문이 인기가 없었거나 판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순보는 전국 관서에 고루 배포되었으며 발행 부수를 보면 감영, 읍, 역, 진의 관리, 민간인, 외국에 나가있는 관리, 일본인 등도 구독하였지만, 많은 발행 부수에도 불구하고 구독료는 잘 걷히지 않았다.*6)이외에도 재정적 운영의 어려움을 보면, 1883년 12월 27일에는 박문국이 인천 해관에서 해관세를 빌리기도 하고, 갑신정변으로 폐간된 후에도 밀린 구독료(1부당 순보 3전, 주보 5전)를 거둬들여야 했다. 순보, 주보 발간과 박문국 운영을 위해 특별세도 거두었고 세금 걷는 것에 관련한 京主人의 행패와 폐단도 많았다. 또 한성주보 제4호(1886.2.22)부터 광고를 실었지만 광고료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며 설령 값을 받았더라도 적은 액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7)
네 번째는 신문 제작 참여 주체에 대한 것이다. 서유견문은 기자들이 신문사에서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모습을 소개하며, 신문에 글을 싣는 것의 자유도, 기고에 대한 국민의 적극성이 높아야 한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좋은 의견을 글로 써서 신문사로 보내면, 신문사에서도 역시 사양하지 않고 반드시 신문에 실어 세상에 전파’하는 충의, 공분심을 고취하는 것이 신문의 큰 기능 중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462면) 반면 당시 한성순보 발간을 준비한 이들은 일반 신문사의 기자가 아닌 정부 소속의 책임자로서 박영효, 실무자로서 유길준, 지원을 위한 내한한 일본인의 구성이었다. 민씨 세력과 개화당 모두 정부를 발간 주체로 규정하여, 순보는 애초부터 관보의 정체성을 지녔다.*8)또한 기사는 실무 담당자인 동문학 주사들이 작성했지만 독판의 비준이 있어야만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업무가 처리될 수 있었기에 보도는 독판의 성향에 영향받았다. 이때 독판은 친청 보수 인물이나 時務를 중요하게 여긴 개화 지식인이 임명되었다.*9) ‘관직이 없는 사람의 투고는 그 내용을 따지지 않고 別本으로 출간하기로 했다.’*10)라는 기록으로 보아 독자 투고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앞서 보았듯이 정부 주체의 관보로서의 성격, 그리고 독판의 성향에 영향받았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비판적인 투고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섯 번째는 정부와 신문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서 서유견문에서는 신문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 간행되고, 또 정부에 대해 신문이 잘잘못을 따지고 국민의 요구를 전달하여, 정부와 국민 모두 삼가서 행동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신문과 정부 간 상호 견제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정부에 모임이 있을 때나 법원에서 판결이 있는 날에 기자를 초청한다는 내용의 소개는 언론에의 정보 공개의 당연시를 추구하는 태도를 보여준다.(461면) 한성순보의 발간자들은 기사내용을 褒貶勸懲하여 안으로는 백성을 교화하고 밖으로는 外侮를 막는데 목적이 있었기에*11) 국민에 대한 교화 목적은 있었으나 정부 발행 신문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정부에 대한 신문의 견제 수행은 어려웠고, 정부의 신문 견제 역시 정부가 직접 발행하는 것을 ‘견제’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영역에서의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백과사전적 개화 사상서로서의 서유견문과 실제 현실의 차이점의 분야, 방향성,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군주정 하에서의 관보로서 내용과 형식이 조보와 유사했고 발행 주체의 의도 자체가 정부 비판이 어려운 구조였으며 언어도 한문 중심이었다는 점이 서유견문과 달랐다. 즉 정치적인 면에서 서유견문이 상정하던 사회와 조선의 군주정 현실이 달랐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이다. 그리고, 과거부터 존재하던 조선 사회의 폐단이 서유견문에는 반영되어있지 않다는 점이 있었다. 京主人의 구독료 수취 횡포 등이 여기에 속한다. 또 현실과 서유견문 속 신문 서술에서 신속성의 차이는, 서유견문이, 비록 책 자체에서도 여러 기술을 ‘새로운 것’으로서 소개하고 있음에도, 문화적 서술에서는 이미 해당 기술 발전을 상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조선은 외신을 접수할 수 있는 연락망이나 인프라가 극히 제한적이었고, 일본-조선-청국 간 우편선의 소요 시일은 최단 6〜10일이었다. 따라서 상해, 홍콩의 여러 일간 신문을 열흘에서 1주마다 발행하는 신문이 따라잡기 어려웠다.*12)
(다음 글에서 이어짐)
주)
1)박정규, 「 漢城旬報와 朝報에 관한 硏究」, 한국언론학보16, 한국언론학회, 1983, 197면.
2)한성순보 순보서.
3)한실비, 漢城旬報의 淸佛戰爭 보도에 나타난 개화지식인의 대외인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4, 11면.
4)한실비, 위의글, 40면.
5)김미지, 『한성순보』와 중국 개항장 신문의 관계에 대한 고찰, 인문과학110,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7, 28면.
6)정진석, 漢城旬報 周報에 관한 硏究, 관훈저널 신문연구36, 관훈클럽, 1983, 127면.
7)정진석, 위의글, 136면.
8)金容浩, 漢城旬報에 관한 文化的 解釋, 언론문화연구6, 서강대학교 언론문화연구소, 1988, 292면.
9)한실비, 위의글, 7면.
10)한성주보 주보서.
11)한성순보 순보서.
12)김미지, 『한성순보』와 중국 개항장 신문의 관계에 대한 고찰, 인문과학110,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7, 25면.
본 탐구에서는 서유견문의 서양문물 소개에서 드러나는 경향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서유견문 속 서양문물 소개와 당시 ‘서양문물 소개’의 대표적 도구였던 신문을 비교하는 것을 통해 서양문물 소개에 있어서 서유견문만의 특성을 알아볼 것이다. 이때 서유견문에서 이야기하는 내용과 신문은 조선의 현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영이 되어있겠지만, 신문과 책으로서의 성격상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러한 차이를 기저에 두고 분석을 진행하고자, Ⅱ에서는 서유견문과 ‘신문’ 자체에 대한 비교를 시행할 것이다. 여기에서 밝혀낸 신문과 서유견문의 성격의 차이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Ⅲ에서는 본격적으로 서유견문의 서양문물 소개를 분석할 것이다. 서유견문이 일반적인 신문의 서양문물 소개와는 어떻게 달랐는지를 알아봄으로써 서유견문의 특징적인 소개 양상을 찾아내고자 한다. 이어서 Ⅳ에서는 그러한 경향성이 드러나게 된 원인을 저자 유길준으로부터 도출해낼 것이다. 이때 주제의 ‘서양문물’이란 물질적 요소뿐 아니라 추상적, 사상적 요소도 포함된 개념으로 정의한다. 즉 본 글에서는 서유견문에서 다루고 있는 서양의 정치사상 및 이론 소개 또한 문물 소개로 보고, 경향성 연구에 포함할 것이다.
유길준은 유학을 통해 개화사상을 지닌 대표적 인물이자, 정부의 일원으로서 여러 개화정책을 이끈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 그가 지은 서유견문은 1895년(고종 32년) 4월 25일 東京 交詢社에서 발행되었으며, 양장본이고 20편 556쪽이다. 국한문혼용체라는 것이 특징이고, 사실상 견문 위주의 ‘여행기’라기보다는 외국 문물에 대한 소개, 그에 대한 유길준의 해석, 유길준의 개화사상이 서술되어있다. 당시 개화의 모델이던 ‘서양문물’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에 적용하고자 하는 부분이 담겨있을 것이다. 비록 백과사전식으로 서술되어있지만, 개인이 쓴 책인 만큼 그 내용과 구성에 주관이 담겨있을 수밖에 없다. 또 서유견문 자체가 단순한 사실 나열이 아닌, 저자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국가의 모습을 담고 있다. 따라서 ‘서유견문’이 서양문물 소개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본 연구는 개화기를 살아가던 지식인으로서 유길준의 태도를 읽고 그의 행적을 해석하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서유견문의 서양문물 소개의 특성을 알아보는 데에 신문과 비교를 하는 방식을 채택한 까닭은, 서유견문만 두고 서양문물 소개의 특성을 살피는 것은 자칫 책에 대한 일률적 설명 나열에만 그치며, 당시 현실에 대한 평면적인 시각 반영만이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과 비교함으로써, ‘시대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드러나는 차이’가 곧 진정한 서유견문만의 특성이 될 것이다. 다른 많은 근대 신문 중에서 하필 『한성순보(주보)』를 선택한 까닭이 바로 그러한 ‘시대적 배경의 공유’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한성순보‧주보의 경우 처음에 유길준이 외아문 주사 자리, 즉 일종의 집필진 자리에 임명되었으나 박영효가 한성판윤에서 물러나 광주 유수로 좌천되고 6일 뒤인 1883년 4월 16일, 유길준은 신병을 이유로 외아문 주사 자리에서 물러난다. 6개월 후인 음력 10월 1일 한성순보가 창간되었다. 발행부서인 박문국의 국장은 김만식(金晚樹)이었다, 한성순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으로서 1883년 10월 31일 박문국(博文局)에서 창간되고, 旬刊로서 열흘마다 간행되었으며 순한문이었다. 17㎝×24㎝의 크기로 1, 2호는 반엽 17항 47자. 3호부터는 23항 47자였다. 순보로서 한 달에 3번 발행되었는데, 음력으로 매 1일에 발행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음력은 작은 달이 29일이기 때문에 9일, 혹은 12일 만에 발간되기도 하였다. 41호까지 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84년 10월 9일 제36호까지는 결호 없이 정상적으로 발행되다가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으나, 한성주보가 1886년 1월 25일부터 다시 간행되어 1888년 7월까지 이어졌다. 한성주보는 매주 월요일에 매 호 20페이지 분량으로 간행되었고 크기는 15㎝×20㎝였다. 한 페이지에 20항 40자, 제24호부터는 16항 40자였으며 처음으로 한글 기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자 전용, 국한문혼용, 한글 전용 등 3가지 형태의 기사가 작성되었지만 33호부터는 한문 기사만으로 바뀐다. 첫 페이지는 표지로서 “漢城周報”라는 제호와 호수가 적히고, 두 번째 페이지는 발행일을 개국기원, 중국연호, 서력 순으로 기재했다. 마지막 페이지는 발행처인 ‘中部 慶幸坊 校洞 博文局’을 적었다. 123호까지 발행됐을 것으로 추정되나, 남아있는 신문은 1888년 3월 12일자의 제106호가 마지막이다.
즉, 1883~88년에 간행되었던 한성순보‧주보와 180년대 초반, 유학길에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고 1886~1889년 동안 집필되어, 1895년에 출간된 서유견문은 시기적으로 유사하다. 또 한성순보는 유길준이 창간 과정에서 그 기틀을 세운 후 실제 간행 이후로는 관여하지 못한 신문이지만, ‘한성신문국장정’, ’신문창간사’, ’신문해설문’ 등 한성순보 간행과 관련한 유길준의 짧은 글들이 전해지며, 해당 글들의 논조는 실제 한성순보‧주보의 간행 양상과 유사했다. 유길준이 입장이 신문과 책이라는 다른 매체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비교하기 더욱 적합하다.
-해제
제목: 西遊見聞
저자 : 유길준(兪吉濬, 1856~1914)
발행처 : 東京 交詢社
발행년도 : 1895년
판본사항 : 金屬活字本
광곽 : 四周雙邊, 無界, 14行 35字
편수 : 20편 71항목
유길준은 박규수 문하에 출입하고 개화파로서 외국 유학을 간 인물로서,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가 후쿠자와 유키치 문항 들어가 게이오의숙에서 공부했으며, 1883년에는 보빙사로 미국에 가서 2년간 유학 생활을 했다. 갑신정변 후 유럽을 거쳐 귀국항 연금되었는데, 『서유견문』은 그때 쓴 책이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내부대신을 지내면서 각종 개혁을 지휘했으나 1896년 아관파천으로 일본에 망명하고 1907년에서야 귀국이 가능했다. 이후 교육과 사회사업을 시행하고 『노동야학독본』과 『대한문전』 등 여러 서적을 간행하였다.
『서유견문』은 일본, 미국, 유럽을 겪은 유길준의 견문을 바탕으로 서술되어 근대 초기 조선에 큰 영향을 미친 백과사전적 개화사상서이다. 출간 후 유길준은 상업적 판매 대신 무료로 1천 부를 찍어 배포했다. 표지에는 제목과 저자·출판사의 한자 표기가 되어있으며, 판권지에는 게이오의숙한 후배 격인 어윤적과 윤치오가 교열을 봤다고 되어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 등 외국 서적을 참조했으며, 세계의 지리를 서론으로 강조하고 이어서 서양의 각종 제도·문물·풍습을 소개하고 조선의 개혁 방향을 제안하는 시무책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국한문체를 채택하고 근대적 어휘와 개념을 여럿 소개한 점도 특징적이다.
『서유견문』은 서문과 목차를 제외하고 총 20편 71개 항목에 달하는 본문으로 구성되어있다. 서론의 제1, 2편은 ‘지구세계의 개론’이라 하여 세계 지리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내용으로서, 중국 중심 시각을 벗어나 전세계적 시야를 가지고 세계 속에서의 조선을 인식해야한다는 의도가 드러난다. 제3~14편은 본론으로, 국가와 국민의 권리와 새로운 정치 사상을 소개한 후, 교육·화폐·법률·경찰 등 보다 자세한 국가 운영 제도를 소개한다. 제14편은 상업을 논하고서 뒷부분에 결론인 ‘개화의 등급’론을 펼친다. 여기서 유길준은 개화, 반개화, 야만으로 문명의 등급을 소개하면서도 그 모두에게 개화의 가능성이 열려있음을 이야기한다. 이후 부록에 해당하는 제15~20편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을 크게 참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러 서양 서적에서 국제법, 경제 정책, 제도 등의 내용을 반영하기도 했다. 총 71개 항목 중 26항목이 『서양사정』을 번역한 내용인데, 그 대부분이 제15편 이후에 집중돼 있다. 부록은 서양의 다양한 풍습과 사회문화적 신문물을 나열하는 장으로, 기술적인 부분에도 주목한다. 부록 중에서도 마지막의 제19, 20편은 미국과 유럽의 여러 대도시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을 통해 조선이 개화한 국가가 되는 기틀을 만들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군사, 산업, 재정과 같은 구체적 국가 부강 노력도 물론 홀대하지 않았으나 그보다 앞서 일종의 기저 준비로서 조선 사람들이 보다 넓은 시각에서 조선을 바라보며 정치, 제도적인 인식의 근대화를 이루어 개화 사상의 기반을 세우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