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 탐구 주제, 방법 및 자료의 적절성 분석
본 탐구에서는 서유견문의 서양문물 소개에서 드러나는 경향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서유견문 속 서양문물 소개와 당시 ‘서양문물 소개’의 대표적 도구였던 신문을 비교하는 것을 통해 서양문물 소개에 있어서 서유견문만의 특성을 알아볼 것이다. 이때 서유견문에서 이야기하는 내용과 신문은 조선의 현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영이 되어있겠지만, 신문과 책으로서의 성격상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러한 차이를 기저에 두고 분석을 진행하고자, Ⅱ에서는 서유견문과 ‘신문’ 자체에 대한 비교를 시행할 것이다. 여기에서 밝혀낸 신문과 서유견문의 성격의 차이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Ⅲ에서는 본격적으로 서유견문의 서양문물 소개를 분석할 것이다. 서유견문이 일반적인 신문의 서양문물 소개와는 어떻게 달랐는지를 알아봄으로써 서유견문의 특징적인 소개 양상을 찾아내고자 한다. 이어서 Ⅳ에서는 그러한 경향성이 드러나게 된 원인을 저자 유길준으로부터 도출해낼 것이다. 이때 주제의 ‘서양문물’이란 물질적 요소뿐 아니라 추상적, 사상적 요소도 포함된 개념으로 정의한다. 즉 본 글에서는 서유견문에서 다루고 있는 서양의 정치사상 및 이론 소개 또한 문물 소개로 보고, 경향성 연구에 포함할 것이다.
유길준은 유학을 통해 개화사상을 지닌 대표적 인물이자, 정부의 일원으로서 여러 개화정책을 이끈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 그가 지은 서유견문은 1895년(고종 32년) 4월 25일 東京 交詢社에서 발행되었으며, 양장본이고 20편 556쪽이다. 국한문혼용체라는 것이 특징이고, 사실상 견문 위주의 ‘여행기’라기보다는 외국 문물에 대한 소개, 그에 대한 유길준의 해석, 유길준의 개화사상이 서술되어있다. 당시 개화의 모델이던 ‘서양문물’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에 적용하고자 하는 부분이 담겨있을 것이다. 비록 백과사전식으로 서술되어있지만, 개인이 쓴 책인 만큼 그 내용과 구성에 주관이 담겨있을 수밖에 없다. 또 서유견문 자체가 단순한 사실 나열이 아닌, 저자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국가의 모습을 담고 있다. 따라서 ‘서유견문’이 서양문물 소개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본 연구는 개화기를 살아가던 지식인으로서 유길준의 태도를 읽고 그의 행적을 해석하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서유견문의 서양문물 소개의 특성을 알아보는 데에 신문과 비교를 하는 방식을 채택한 까닭은, 서유견문만 두고 서양문물 소개의 특성을 살피는 것은 자칫 책에 대한 일률적 설명 나열에만 그치며, 당시 현실에 대한 평면적인 시각 반영만이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과 비교함으로써, ‘시대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드러나는 차이’가 곧 진정한 서유견문만의 특성이 될 것이다. 다른 많은 근대 신문 중에서 하필 『한성순보(주보)』를 선택한 까닭이 바로 그러한 ‘시대적 배경의 공유’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한성순보‧주보의 경우 처음에 유길준이 외아문 주사 자리, 즉 일종의 집필진 자리에 임명되었으나 박영효가 한성판윤에서 물러나 광주 유수로 좌천되고 6일 뒤인 1883년 4월 16일, 유길준은 신병을 이유로 외아문 주사 자리에서 물러난다. 6개월 후인 음력 10월 1일 한성순보가 창간되었다. 발행부서인 박문국의 국장은 김만식(金晚樹)이었다, 한성순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으로서 1883년 10월 31일 박문국(博文局)에서 창간되고, 旬刊로서 열흘마다 간행되었으며 순한문이었다. 17㎝×24㎝의 크기로 1, 2호는 반엽 17항 47자. 3호부터는 23항 47자였다. 순보로서 한 달에 3번 발행되었는데, 음력으로 매 1일에 발행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음력은 작은 달이 29일이기 때문에 9일, 혹은 12일 만에 발간되기도 하였다. 41호까지 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84년 10월 9일 제36호까지는 결호 없이 정상적으로 발행되다가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으나, 한성주보가 1886년 1월 25일부터 다시 간행되어 1888년 7월까지 이어졌다. 한성주보는 매주 월요일에 매 호 20페이지 분량으로 간행되었고 크기는 15㎝×20㎝였다. 한 페이지에 20항 40자, 제24호부터는 16항 40자였으며 처음으로 한글 기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자 전용, 국한문혼용, 한글 전용 등 3가지 형태의 기사가 작성되었지만 33호부터는 한문 기사만으로 바뀐다. 첫 페이지는 표지로서 “漢城周報”라는 제호와 호수가 적히고, 두 번째 페이지는 발행일을 개국기원, 중국연호, 서력 순으로 기재했다. 마지막 페이지는 발행처인 ‘中部 慶幸坊 校洞 博文局’을 적었다. 123호까지 발행됐을 것으로 추정되나, 남아있는 신문은 1888년 3월 12일자의 제106호가 마지막이다.
즉, 1883~88년에 간행되었던 한성순보‧주보와 180년대 초반, 유학길에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고 1886~1889년 동안 집필되어, 1895년에 출간된 서유견문은 시기적으로 유사하다. 또 한성순보는 유길준이 창간 과정에서 그 기틀을 세운 후 실제 간행 이후로는 관여하지 못한 신문이지만, ‘한성신문국장정’, ’신문창간사’, ’신문해설문’ 등 한성순보 간행과 관련한 유길준의 짧은 글들이 전해지며, 해당 글들의 논조는 실제 한성순보‧주보의 간행 양상과 유사했다. 유길준이 입장이 신문과 책이라는 다른 매체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비교하기 더욱 적합하다.
-해제
제목: 西遊見聞
저자 : 유길준(兪吉濬, 1856~1914)
발행처 : 東京 交詢社
발행년도 : 1895년
판본사항 : 金屬活字本
광곽 : 四周雙邊, 無界, 14行 35字
편수 : 20편 71항목
유길준은 박규수 문하에 출입하고 개화파로서 외국 유학을 간 인물로서,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가 후쿠자와 유키치 문항 들어가 게이오의숙에서 공부했으며, 1883년에는 보빙사로 미국에 가서 2년간 유학 생활을 했다. 갑신정변 후 유럽을 거쳐 귀국항 연금되었는데, 『서유견문』은 그때 쓴 책이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내부대신을 지내면서 각종 개혁을 지휘했으나 1896년 아관파천으로 일본에 망명하고 1907년에서야 귀국이 가능했다. 이후 교육과 사회사업을 시행하고 『노동야학독본』과 『대한문전』 등 여러 서적을 간행하였다.
『서유견문』은 일본, 미국, 유럽을 겪은 유길준의 견문을 바탕으로 서술되어 근대 초기 조선에 큰 영향을 미친 백과사전적 개화사상서이다. 출간 후 유길준은 상업적 판매 대신 무료로 1천 부를 찍어 배포했다. 표지에는 제목과 저자·출판사의 한자 표기가 되어있으며, 판권지에는 게이오의숙한 후배 격인 어윤적과 윤치오가 교열을 봤다고 되어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 등 외국 서적을 참조했으며, 세계의 지리를 서론으로 강조하고 이어서 서양의 각종 제도·문물·풍습을 소개하고 조선의 개혁 방향을 제안하는 시무책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국한문체를 채택하고 근대적 어휘와 개념을 여럿 소개한 점도 특징적이다.
『서유견문』은 서문과 목차를 제외하고 총 20편 71개 항목에 달하는 본문으로 구성되어있다. 서론의 제1, 2편은 ‘지구세계의 개론’이라 하여 세계 지리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내용으로서, 중국 중심 시각을 벗어나 전세계적 시야를 가지고 세계 속에서의 조선을 인식해야한다는 의도가 드러난다. 제3~14편은 본론으로, 국가와 국민의 권리와 새로운 정치 사상을 소개한 후, 교육·화폐·법률·경찰 등 보다 자세한 국가 운영 제도를 소개한다. 제14편은 상업을 논하고서 뒷부분에 결론인 ‘개화의 등급’론을 펼친다. 여기서 유길준은 개화, 반개화, 야만으로 문명의 등급을 소개하면서도 그 모두에게 개화의 가능성이 열려있음을 이야기한다. 이후 부록에 해당하는 제15~20편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을 크게 참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러 서양 서적에서 국제법, 경제 정책, 제도 등의 내용을 반영하기도 했다. 총 71개 항목 중 26항목이 『서양사정』을 번역한 내용인데, 그 대부분이 제15편 이후에 집중돼 있다. 부록은 서양의 다양한 풍습과 사회문화적 신문물을 나열하는 장으로, 기술적인 부분에도 주목한다. 부록 중에서도 마지막의 제19, 20편은 미국과 유럽의 여러 대도시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을 통해 조선이 개화한 국가가 되는 기틀을 만들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군사, 산업, 재정과 같은 구체적 국가 부강 노력도 물론 홀대하지 않았으나 그보다 앞서 일종의 기저 준비로서 조선 사람들이 보다 넓은 시각에서 조선을 바라보며 정치, 제도적인 인식의 근대화를 이루어 개화 사상의 기반을 세우고자 했다.
(다음 글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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