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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견문의 시대성에 대한 탐구

 

1. 서유견문 서술 과정 및 수용에서의 시대성 적용

 

을 위한 신문과의 비교 작업에 앞서 먼저 서유견문 자체의 시대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서유견문은 유길준이 귀국 후 한규설의 집에 연금된 상태에서 1886~9년에 집필하여 95년에 출간한 서적이다. 유길준은 1881, 신사유람단으로서 일본에 가서 당시 유명한 문명개화론자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게이오의숙에 입학했다. 이후 그는 18839월 보빙사로 미국에 파견되어 유학 생활을 하며 서유견문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이듬해 9월에 귀국 명령이 내려졌고, 188512월에 귀국하고서 한규설의 집에 연금되었다. 그러나 비교적 자유로운 집필 활동이 가능하여 약 4년간 서유견문을 집필하고 1890년에 초고를 고종에게 바쳤다. 1892년에 이르러서야 연금에서 풀려난 유길준은 갑오개혁 후 일본 파견 보빙사에 수행원으로 참여하였고 일본에 갔을 때 후쿠자와 유키치가 운영하던 도쿄 교순사에서 1895년에 서유견문을 출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집필, 출간된 서유견문은 유길준이 생각한 이상적인 개화의 이야기가 담긴 책으로 일종의 이론서로서의 성격이 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문물소개서이기에, 서양문물에 대한 긍정적 시각이 기본적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아예 이상적, 비현실적인 내용만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 서유견문 속 정치, 문화 등의 많은 서술은 이미 서양에서 시행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는 서양에서의 상황이었을 뿐, 개항과 개화가 이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선의 현실과는 꽤나 차이가 있는 건 당연했다. 이러한 현실의 차이, 그리고 신문과 책이라는 매체의 종류의 차이는 서술의 방식에도 영향을 끼칠 것 역시 당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어지는 절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차이가 나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이를 확인하는 이유는, 에서의 신문과 서유견문의 서양문물 소개 양상 비교가 공정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둘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인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 연구에서는 서유견문과 한성순보주보의 비교를 통하여 드러나는 차이점을 한성순보의 한계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유견문에 대해 알아보는 도구로 삼을 것이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서유견문이 당시 정치 사회 문화와 어떻게, 얼마나 차이가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2. 서유견문 속 신문 서술과 한성 순보주보 비교

 

서유견문의 17新聞紙단원에서 바람직하게 여기는 신문의 요건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는 기사의 내용 측면에서 조정 및 민간 비판, 여론 수렴국민 요구 전달, 농업 상업에 대한 업무를 널리 알리고, 군사, 학술 등을 다뤄야 하며, 법률이나 기계 등 주제의 전문성을 갖춘 글, 그리고 특정 독자층, 예컨대 여성 독자층의 집중화된 글도 나타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용이 상업의 현황, 물가의 등락을 알리는 데에 그치고 조정의 정치 법령이 잘 되었다거나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실리지 않는 신문은 적막하다고 표현한다.(458) 반면 한성순보주보는 조보를 자료원으로 하여, 대부분의 기사가 조보의 내용과 체재를 많이 따른다. 구체적으로 보면 순보 창간호의 국내기사는 지방관의 보고인 장계, 중앙관서에서 올린 건의, 국왕의 동정 기사가 모두 15건이었고 순보 제2호에서는 각도의 관찰사 및 암행어사가 보낸 보고서, 상소문, 국왕의 幸行, 영사들의 입경 소식 등이 게재되어있었다. , 내용 구성 면에서 조보의 성격이 강했음을 확인 가능하다.*1) 다만 국내기사가 조보의 성격을 강하게 띠긴 했으나 비중은 외국기사가 높았다. 한성순보는 세계 속의 방위鎭浸政令법도재정기계빈부飢饟인품의 선악물가의 고저 등을 정확히 밝히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2) 이러한 외국기사를 적을 때, 총 외국기사 1,150건 중 571건이 중국의 정기간행물을 원자료로 사용했고 홍콩베트남을 출처로 한 것을 포함하면 중국 측 정보가 694개였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 입수하는 정보는 93건으로 비교적 소수였다.*3) 이처럼 중국 중심의 외국기사 수집이었기에, 청불전쟁의 발단, 전개양상, 청조의 대응방식에 주목하는 기사가 많았다. 다만 주보 시기에 가면 일본 측에서 얻는 자료도 늘어난다.*4)

 

두 번째로는 신문 보도의 신속성이다. 서유견문에서는 영국 정부의 아침 회의 내용이 오후에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까지도 전해진 사례를 제시하며 외국 신문의 신속성을 강조한며, ‘여러 신문사들이 빨리 보도하기를 다투고, 구독하는 자들도 전파되는 사실을 빨리 알아야 즐겁게 생각한다고 말한다.(461) 반면 한성순보주보의 경우, 순보 제1호에는 기사의 날짜도 분명히 명시되지 않았고, 그나마 제2호부터는 날짜가 분명히 명시되는 기사가 대다수를 차지하였으나 중국 신문의 원 기사와는 약 두 달간의 시차가 있었다. 점차 시차가 줄고 마지막에는 시차가 한 달이 안 되기는 하지만, 이는 한성순보가 정해진 날짜보다 지연 발간되었을 가능성이 있기에 신속성 향상의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음력 611일자 한성순보 29호에 음력 66일에서 15申報의 기사들이 대거 실린 것이 지연 발간의 상황을 보여준다.*5)

 

세 번째로는 신문의 대중 인기 및 판매 정도에 대한 것이다. 서유견문은 신문을 사보는 자가 있은 다음에야 신문을 판매할 수 있으니, 이를 미루어 본다면 신문도 상업의 한 가지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서양 국가들에서 신문을 활발히 판매하는 양상,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여 광고료를 받는 방식도 소개한다. 반면 한성순보에서는 창간 시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고문으로 참여하자 일부 친청 보수세력 중심으로 서양과 일본에 우호적이라며 반발이 일었고, 갑신정변 때 박문국이 불타서 폐간된 것도 그러한 반감이 일부 작용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1888714일 박문국이 경영난 등으로 교섭아문에 통합되며 한성주보가 폐간된 것 역시, 신문이 인기가 없었거나 판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순보는 전국 관서에 고루 배포되었으며 발행 부수를 보면 감영, , , 진의 관리, 민간인, 외국에 나가있는 관리, 일본인 등도 구독하였지만, 많은 발행 부수에도 불구하고 구독료는 잘 걷히지 않았다.*6) 이외에도 재정적 운영의 어려움을 보면, 18831227일에는 박문국이 인천 해관에서 해관세를 빌리기도 하고, 갑신정변으로 폐간된 후에도 밀린 구독료(1부당 순보 3, 주보 5)를 거둬들여야 했다. 순보, 주보 발간과 박문국 운영을 위해 특별세도 거두었고 세금 걷는 것에 관련한 京主人의 행패와 폐단도 많았다. 또 한성주보 제4(1886.2.22)부터 광고를 실었지만 광고료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며 설령 값을 받았더라도 적은 액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7)

 

네 번째는 신문 제작 참여 주체에 대한 것이다. 서유견문은 기자들이 신문사에서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모습을 소개하며, 신문에 글을 싣는 것의 자유도, 기고에 대한 국민의 적극성이 높아야 한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좋은 의견을 글로 써서 신문사로 보내면, 신문사에서도 역시 사양하지 않고 반드시 신문에 실어 세상에 전파하는 충의, 공분심을 고취하는 것이 신문의 큰 기능 중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462) 반면 당시 한성순보 발간을 준비한 이들은 일반 신문사의 기자가 아닌 정부 소속의 책임자로서 박영효, 실무자로서 유길준, 지원을 위한 내한한 일본인의 구성이었다. 민씨 세력과 개화당 모두 정부를 발간 주체로 규정하여, 순보는 애초부터 관보의 정체성을 지녔다.*8) 또한 기사는 실무 담당자인 동문학 주사들이 작성했지만 독판의 비준이 있어야만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업무가 처리될 수 있었기에 보도는 독판의 성향에 영향받았다. 이때 독판은 친청 보수 인물이나 時務를 중요하게 여긴 개화 지식인이 임명되었다.*9)관직이 없는 사람의 투고는 그 내용을 따지지 않고 別本으로 출간하기로 했다.’*10)라는 기록으로 보아 독자 투고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앞서 보았듯이 정부 주체의 관보로서의 성격, 그리고 독판의 성향에 영향받았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비판적인 투고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섯 번째는 정부와 신문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서 서유견문에서는 신문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 간행되고, 또 정부에 대해 신문이 잘잘못을 따지고 국민의 요구를 전달하여, 정부와 국민 모두 삼가서 행동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신문과 정부 간 상호 견제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정부에 모임이 있을 때나 법원에서 판결이 있는 날에 기자를 초청한다는 내용의 소개는 언론에의 정보 공개의 당연시를 추구하는 태도를 보여준다.(461) 한성순보의 발간자들은 기사내용을 褒貶勸懲하여 안으로는 백성을 교화하고 밖으로는 外侮를 막는데 목적이 있었기에*11) 국민에 대한 교화 목적은 있었으나 정부 발행 신문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정부에 대한 신문의 견제 수행은 어려웠고, 정부의 신문 견제 역시 정부가 직접 발행하는 것을 견제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영역에서의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백과사전적 개화 사상서로서의 서유견문과 실제 현실의 차이점의 분야, 방향성,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군주정 하에서의 관보로서 내용과 형식이 조보와 유사했고 발행 주체의 의도 자체가 정부 비판이 어려운 구조였으며 언어도 한문 중심이었다는 점이 서유견문과 달랐다. 즉 정치적인 면에서 서유견문이 상정하던 사회와 조선의 군주정 현실이 달랐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이다. 그리고, 과거부터 존재하던 조선 사회의 폐단이 서유견문에는 반영되어있지 않다는 점이 있었다. 京主人의 구독료 수취 횡포 등이 여기에 속한다. 또 현실과 서유견문 속 신문 서술에서 신속성의 차이는, 서유견문이, 비록 책 자체에서도 여러 기술을 새로운 것으로서 소개하고 있음에도, 문화적 서술에서는 이미 해당 기술 발전을 상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조선은 외신을 접수할 수 있는 연락망이나 인프라가 극히 제한적이었고, 일본-조선-청국 간 우편선의 소요 시일은 최단 610일이었다. 따라서 상해, 홍콩의 여러 일간 신문을 열흘에서 1주마다 발행하는 신문이 따라잡기 어려웠다.*12)

 

 

(다음 글에서 이어짐)


주)

1)박정규, 「 漢城旬報와 朝報에 관한 硏究」, 한국언론학보16, 한국언론학회, 1983, 197면.

2)한성순보 순보서.

3)한실비, 漢城旬報의 淸佛戰爭 보도에 나타난 개화지식인의 대외인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4, 11면.

4)한실비, 위의글, 40면.

5)김미지, 『한성순보』와 중국 개항장 신문의 관계에 대한 고찰, 인문과학110,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7, 28면.

6)정진석, 漢城旬報 周報에 관한 硏究, 관훈저널 신문연구36, 관훈클럽, 1983, 127면.

7)정진석, 위의글, 136면.

8)金容浩, 漢城旬報에 관한 文化的 解釋, 언론문화연구6, 서강대학교 언론문화연구소, 1988, 292면.

9)한실비, 위의글, 7면.

10)한성주보 주보서.

11)한성순보 순보서.

12)김미지, 『한성순보』와 중국 개항장 신문의 관계에 대한 고찰, 인문과학110,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7,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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