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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1. 물건을 잃어버리게 하는 他意의 존재 여부 
  가. 자의적 결과로서의 상실 
    1) 의식적인 행위인 경우
    2) 무의식적인 행위인 경우
 나. 타의적 결과로서의 상실
    1) 물건의 소유권을 옮겨받지 못하는 타자

      가) 소유권을 획득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이익인 경우

      나) 타의의 발산자의 의도된 행위가 아닐 경우
    2)물건의 소유권을 옮겨받는 타자
 다. 블랙홀의 의미 확장

2. 보완적 논의 - 블랙홀의 증명 가능성 확인
  경우 1: 블랙홀이 있으며 그 존재의 증명도 가능하다
  경우 2: 블랙홀이 있지만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경우 3: 블랙홀이 없으며 그 부재를 증명할 수 있다
  경우 4: 블랙홀이 없지만 그 부재를 증명할 수 없다

3. 블랙홀의 발생 시각

  가. 물건을 잃어버릴 때에만 한시적으로 발생

  나. 물건을 잃어버리는 순간과는 별개로 간헐적 발생

  다. 항상 존재 유지


4. 블랙홀의 위치

  가. 물건을 잃어버린 장소

  나.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은 장소

  다. 독립적인 장소


5. 블랙홀, 그 후


구체적인 상실의 양상에 대해 가능한 경우의 수를 낱낱이 탐구함으로써 잃어버린 물건의 향방과 행방을 파악하고자 한다.

 

1. 물건을 잃어버리게 하는 他意의 존재 여부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은 자의적인 결과일까, 혹은 타의적인 불가피함의 산물일까? 의도의 방향성을 파악해여 물건을 잃어버리는 원인을 특정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본 논의의 목적지이자 잃어버린 물건들의 행방으로서의 '블랙홀'까지 찾아갈 수 있을 테다.

 

 가. 자의적 결과로서의 상실

자의적인 행위로 '물건을 잃어버린다'라는 결과가 도출되려면 상실이 주체의 이익에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부합해야 한다.

 

  1) 의식적인 행위일 경우

우선 상실이 의식적인 행위일 가능성이 있을까.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현실적인 소유관계의 해체라는 결핍의 상태를 가져온다. 그뿐 아니라 물건이 주체로서의 물건 주인의 종속적인 조각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 물건은 주체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이다. 편의를 위해 물건의 기존 주인을 *이라고 부르겠다. 따라서 '잃어버림'은 貞 스스로의 온전성의 상실을 가져오는 행위이기도 하다. 자신과 외부의 관계맺음과 더불어 자기 구성적 성질이 동시다발적으로 흐트러진다. 이러한 다면적인 자기-상실이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는 상황이 가능할까. 한정적으로는 성립 가능할 여지가 보인다. 소유관계의 존재가 언제나 貞에게 있어서 선의로 작용하지는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유가 과도성을 띤다면 이는 소유의 주인으로서의 貞의 존재가 본질을 희석당하는 부정적 결론까지 이어질 수 있다. 

 

소유가 과도하여 상실에 부여된 가치가 반전되려면, 원래 貞을 설명하는 하나의 구성 성분에 불과했던 소유는 貞을 억압할 정도의 자아와 존재감을 지니는 상태로 비대해져야 한다. 이때 이러한 비대함은 단순히 소유 대상의 양적 측면을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다. '소유의 대상'은 소유라는 관계를 성립하게 하는 실천적 도구이자, 세상이라는 물체적 시연에 추상의 개념이 현신하는 일종의 피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상보다는 각 실존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맺음의 양상' 그 자체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다만 주의할 점이 있다. 세상의 짜임새를 결정짓는 차원에서 소유는 실체보다 상위의 존재이지만, 실존적인 자립체로서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의 차원에서 소유는 보조적 역할에 불과하다. 후자의 경우에 대해 비대함이 작용하여 위치 역전의 기능을 해야 한다. 기존에 연결고리에 불과했던 소유가 '충분히' 비대해진다면 그 자체로서 하나의 특이점으로 정립될 수 있을 테다. 이 '충분함'의 정도도 짧게나마 정의해볼 수 있다. 인간과 사물은 특정 의미를 갖는 존재로서 소유의 보조를 받아 세상을 구성하는데, 이러한 주-보조의 관계를 깰 정도로 소유가 충분할 때에 한정되어서야만 상실이 의식적으로 貞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이는 상실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상황을 불러오는 한정적 사례이므로 '잃어버린 물건들은 결국 자의적인 행위의 결과이다'라고 단언할 정도의 일반화는 불가했다.

 

  2) 무의식적인 행위일 경우

두번째로, 무의식적 범위에서 貞의 이익에 부합하였기에 자신도 모르게 이루어진 자의적 행위일 가능성이 있을까. 

이때, '자신도 모르게 이루어진'이라는 속성이 상위 목차의 '자의적인'이라는 표현과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후술할 '타의적 행위' 측면에서도 타의의 발산자가 '의도치 않게' 상실을 초래할 경우를 분석해볼 것이기에, 논의의 균형을 위하여 두 표현의 양립 가능성을 전제할 것이다.

 

상실이 무의식적으로 貞에게 이익이기 위해서는 소유가 무의식과 부합하지 않았어야 한다. 무의식은 자아의 원개념이 존재하는 장소로서 우리의 존재 중 본능적인 영역만을 모아놓은 범주이다. 따라서 특정한 종류의 소유만이 무의식적 이익을 저해할 수 있으며, 이때의 소유는 貞의 본질적인 부정적 특성만이 잔존하는 양상을 의미하게 된다. 또한 우리는 현재 의식적 범위에서 이익이 되는 상황은 배제하고 무의식적 범위로만 제한된 이익을 가져오는 상실에 대해 확인하고 있기에 여기서의 소유는 1)에서 가정한 한정적 비대함은 고려하지 않은, 그저 연결고리에 불과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 결과 본 가정에서의 소유는 그 자체의 존재감은 희소함과 동시에 세상의 특이점으로서의 존재자들을 이어주는 과정에서 그들의 본능을 침해할 만큼의 장악력은 지녀야 한다.

하지만 존재의 본능을 침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하고, 영향을 끼칠 수 있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존재자가 각기 지니는 위치 상태를 왜곡할 가능한 자리에 올라야 하고, 그렇게 세상의 현 위치 상태를 흐트러트리고 침해할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어엿한 '존재'로서 자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소유가 관계를 넘어서 존재자로서, 貞 혹은 적어도 소유대상으로서의 물건과 동일 지위에 올라야만 가능하다. 이는 1)에서의 비대함을 배제하고 무의식적 범위에만 한정된 소유에 대해 논의하겠다는 애초의 전제와 어긋나기에 성립할 수 없다.

 

1)2)를 정리하자면, 상실이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어 자의적으로도 발생하려면 소유가 '통로'를 넘어 '실존적 특이점'으로서의 지위까지 가져야 한다. 또, 오직 무의식적인 의미에서의 소유의 위협에 대한 논의는 소유의 위력을 과대평가하는 태도이기에 적절치 못하다. 소유의 특성이 의식적 차원에서의 상실 행위를 유발하는 특이적인 경우에 한정되어야 상실이 貞의 이익 증가와 동치가 될 수 있다.

 

 나. 타의적 결과로서의 상실

다음으로는 상실이 타의적인 행위의 결과물일 것을 상정해보자. 자의적 행위의 가능성을 따져볼 때에 貞이라는 존재에 주목하여 그 내면의 의식적/무의식적 의사 발현을 탐구했듯이, 타의성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선 그 타의를 발산하는 존재가 있음을 가정해야 할 테다. 편의를 위해 그 타의의 발산자를 淑*이라 치환해두겠다.

 

이는 i)물건의 소유관계의 구성원이 되지 못하는 타자일 경우와, ii)貞이 물건을 잃음으로서 새로운 소유관계의 구성원이 되는 자, 즉 곧 물건의 신규 집결지로서의 타자 중 하나일 것이다.

 

  1) 물건의 소유권을 옮겨받지 못하는 타자

이는 i)이 이익을 달성하는 데에 구태여 소유권을 옮겨받을 필요가 없었거나, ii)상실을 일으키는 타의의 발산이 애초에 의 의도가 아니었기에 소유권 이동도 고려하지 않아 실천되지 않았을 두 가지 상황이 가능하다.

 

   가) 소유권을 획득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이익인 경우

물건의 소유권을 이동시킨다는 것 자체가 淑에게 이득이 되기에 굳이 소유권까지 획득할 필요는 없을 수 있다. 이 경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i)기존 주인인 貞이 소유권을 잃는다는 사실이 淑에게 이득이 되는 경우와, ii)소유의 이동 과정이 淑에게 이득이 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전자라면 貞의 기존의 소유가 淑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방향으로 그 영향력을 발산했어야 한다. 소유가 타 존재의 존립에 위해를 끼치려면, 해당 소유는 貞과 소유대상뿐 아니라 외부로도 관계성을 뻗칠 수 있을 지위로 규정되어 있어야 한다. 소유라는 매개체에 貞 또는 소유 대상의 전개 범위을 변이시키는 힘이 있어, 소유가 없었더라면 기존에 없었던 접점이 貞-淑, 혹은 소유대상-淑의 두 영역 간에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해당 교차는 상실과 함께 해제되어야만 貞의 상실이 淑에게 이득이 될 테다. 그러나 영역 간 교차는 실존 간에 서로를 간섭하는 현상으로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포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유와는 별개의 관계맺음 양상이다. 따라서 이 가정은 소유가 곧 소유와 '별도'인 개념과 '동일'하다고 말하는 모순적인 결론을 가져오므로 적절치 못하다.

 

후자라면 '소유의 이동 과정'에서 외부적인 발산 효과가 증명될 필요가 있다. 현존재 간 관계맺음이 의미의 연쇄를 거듭한 결과 각 존재자의 존재가 달성된다는 측면에서, 소유는 세상을 구조화하는 가교 중의 하나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존립 구조가 바뀐다는 차원에서 소유의 이동, 다시말해 소유의 변화는 얼핏 그 자체로 세상에 '흐트러짐'을 가져오는 원인으로 기능할 수 있을 듯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1.가.1)'의 논의를 상기해보자. 소유는 세상의 구조를 결정짓는 차원에서는 실체로서의 존재자보다 우월성을 띠지만, 정작 존재자들이 상호작용하는 세상에 적용되는 순간 보조적 역할로 한정된다.  본 단락에서 논의되는 소유의 외부적 발산은 존재자들에 대한 실존 세계에서의 영향력 행사이므로, 앞 문장에서 후자, 즉 소유가 한정적 의미를 갖는 경우이다. 따라서 소유 그 자체는 물론이고 소유의 이동 과정은 더더욱, 淑이 貞으로 하여금 상실을 경험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없다.

 

   나) 타의의 발산자의 의도된 행위가 아닐 경우

잃어버림이 타의적 산물이기는 하지만 淑이 의도한 바는 아닐 수 있다. 이 경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淑이 소유와의 관련성을 띠지 않는 다른 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貞의 상실이 이루어졌어야 한다. 타인의 소유관계에 결과론적으로 영향을 끼치지만 그 자체로서는 소유권과 관련이 없는 행위는 무엇이어야 할까. 소유와는 별도로 성립하는, 貞과 淑의 여타 관계맺음의 양상이 변동하는 와중에 소유가 영향받았을 수 있다. 연쇄적 변동을 역진적으로 고찰해본다면, 여타 연결성에 영향받기 위해서는 소유라는 통로가 貞과 소유대상 간 관계를 넘어선 차원까지 닿아있음을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의 소유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일대일 관계성을 탈피하여 貞-소유대상-淑라는 복합적인 실존적 거점을 지니는 새로운 개념으로 확장된다. 즉 소유가 더이상 소유가 아닌 다른 관계성이 되어버린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본 논의에 적절치 못하다. 첫째로 淑이 영향을 끼치는 관계성이 더이상 소유가 아닌, 한때 소유였던 개념이 변이한 무언가에 불과하게 되어 '잃어버림'에 대한  淑의 원인적 행태를 탐구할 수 없다. 둘째로 貞과 淑이 서로 연결되며 淑의 상실 의도 발산은 더이상 '타의'라고 구별하기 모호해진다.

 

 

  2)물건의 소유권을 옮겨받는 타자

잃어버린 물건들의 집결지가 있다면 그들의 '잃어버림'이라는 특성이 비로소 통일된 결과로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블랙홀이라는 임의의 위치 좌표를 타자의 역할로 사용하고자 한다. 과학적 의미보다는 물건의 존재와 상실의 의미를 덧입힌 관점에서의 블랙홀은, 중력이 최대치로 적용되는 지점이기에 위치를 잃은 존재들이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종착지의 의미까지 내재한다. 이 경우 貞에게는 상실이 부정적인 의미이겠지만, 소유대상으로서의 물건들에게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로써 상실은 상반되는 의미를 결집하는 행위로 승화된다.

 

사물이라는 존재는 인간이라는 존재자와의 의미상 연관관계 속에 자리할 때에만, 즉 쓸모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고 그 쓰임의 연쇄관계의 맨 끝쪽에 현존재로서의 인간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세상에서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소유대상으로서의 사물이 기존 소유관계의 해체를 겪어 貞이 사물을 상실할 뿐 아니라 사물도 貞을 상실하게 된다면, 즉각적으로 새로운 소유관계가 형성되어 존재자들 간 관계맺음의 일부가 되어야 그 물건의 세상에서의 실존이 연속선을 그릴 수 있다. 그러나 물건은 주체적으로 관계맺음을 시작하는 능력을 결여하기에, 새로운 貞으로의 즉각적인 연결은 불가능에 가깝다. 실존이 단절되어 존재성의 함수가 불연속의 성질을 띠는 상황은 존재자들 간 구조적 질서의 붕괴와 동치이기에, 소유의 공백을 메울 임시적 소유 주체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블랙홀이 존재하며, 물건이 상실될 때 즉각적으로 블랙홀이 그 소유권을 옮겨받는다면 상실의 발생에도 존재자들 간 구조의 견지가 가능하게 된다.

 

다. 블랙홀의 의미 확장

이 시점에서, 우리는 블랙홀을 '타자'로는 두되 '타의의 발산자'와는 분리된 개념으로 재정립할 수 있다. 淑과는 별개의 존재가 된 블랙홀은, 소유권을 이전받는 집결지의 성격은 유지하겠으나 자의적인 행동의 결과로 상실된 물건에 대해서도 집결지의 기능을 하게 된다는 포괄성을 확보한다. 이러한 의미 확장이 이루어지는 까닭은 목차 나.2)에서 살펴보았듯이 블랙홀의 존재가 물건의 상실이라는 상황에서 언제나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목차 1에서의 논의를 정리해보면,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은 소유가 충분히 비대한 존재감을 가질 때의 한정적인 경우에 자의적으로 발생하거나, 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물건의 소유권을 이전받을 타자의 의도에 의해 발생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잃어버린 물건은 즉각적으로 블랙홀에 집결됨으로써 소유대상의 실존이 단절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다.

 

 

2. 보완적 논의 - 블랙홀의 증명 가능성 확인

 경우 1: 블랙홀이 있으며 그 존재의 증명도 가능하다

이는 블랙홀이 필수적인 맥락적 구조가 짜여지는 상황에서 성립하는 표현이다. 목차 1.나.2)~1.다.에서도 보았듯이 존재 함수의 연속성 달성을 위해 블랙홀이 즉각적인 상실 해소의 역할을 해야 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블랙홀의 의미를 숙, 즉 타의의 발산자로 다시 좁힌더라도 블랙홀의 존재가 증명된다면, 블랙홀의 존재성은 완비될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한정적 차원에서만 성립되는 자의적 행동으로서의 상실을 논했었다. 그러한 한정성이 지나친 제약 조건으로 인해 실제 세상에서는 실현불가능하다면, 물건의 소유권을 옮겨받는 淑으로서의 블랙홀이 반드시 존재하게 된다. 제한성의 지나침 정도를 판단하는 것은 소유가 특이점으로서의 변환 잠재력을 내재하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이는 존재자와 그 연결고리 간 실체성의 차이를 명확히 밝혀야만 파악해낼 수 있기에 현 시점에서는 결론짓기 어려우나, 그렇기에 동시에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따라서 경우 1목차1에서의 논의를 신뢰할 경우 확실하게 성립 가능하며, 목차 1에 대한 의구심이 잔존할 경우에 한정적으로 성립 가능하다.

 

 경우 2: 블랙홀이 있지만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이는 잃어버린 물건들이 변경된 위치 좌표를 취하지 못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관점이다. 만약 상실이 새로운 위치로의 이동을 단일하게 시사한다면, 블랙홀이라는 집결지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목차 1.다.에서 보았듯이 물건의 상실로 인해 존재자 간 관계맺음으로 구조화된 실체로서의 세상이 흔들린다는 점을 떠올리면, 변경된 위치 좌표를 취하지 못할 경우는 배제함이 마땅하다. 따라서 경우 2는 성립될 수 없다.

 

 경우 3: 블랙홀이 없으며 그 부재를 증명할 수 있다

 이는 블랙홀이 없어도 상실된 물건의 실존 단절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나 블랙홀 이외에 존재가 물건이 상실됨에 따라 그 존재를 받아오는 역할을 하게 된다면, 해당 존재는 블랙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는 블랙홀의 존재를 증명한 것으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경우 3은 성립될 수 없다.

 

 경우 4: 블랙홀이 없지만 그 부재를 증명할 수 없다

 무언가의 존재에 대한 주장과 부존재에 대한 주장이 대립할 때, 증명의 의무가 선행되어야 할 입장은 존재성을 주장하는 쪽이다. 블랙홀이 있음을 완벽하게 입증해내지 못하고 잃어버린 물건 집결지가 부재할 가능성의 실마리가 남는다면 우리는 블랙홀이 없음을 잠정적으로 인정해두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확인되었듯이 블랙홀이 있어야만 물건의 상실이 가져오는 구조적 붕괴 위험을 해소할 수 있기에 존재 입증이 완료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경우 4는 성립할 수 없다.

 

 

목차 2에서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경우 1~4 중에 성립 가능성이 있는 항목은 경우 1뿐이었다. 해당 항목에서는 목차 1.에서의 블랙홀의 필수성에 대한 논의를 신뢰할 경우 블랙홀의 존재 증명이 확실히 입증되었고 목차 1.의 결과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을 경우 한정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경우 2~4가 모두 불성립하는 것으로 확인되었기에 해당 항목들의 여집합으로서 유일하게 남은 경우 1은 언제나 성립하는 항목임을 유추해낼 수 있다. 따라서 경우 1 내부에서의 입증의 한정성에도 불구하고 목차 2. 전체를 아울러 보았을 때 경우 1의 입증은 완전성을 띠게 된다. 이를 통해 상실된 물건의 블랙홀은 존재하며 이는 목차 1.에서의 논의로 증명되었음을 재확인하였다.

 

 

3. 블랙홀의 발생 시각

목차 1~2에서 블랙홀의 존재를 확인했으므로 구체적인 블랙홀의 성격을 탐구해야 한다. 블랙홀이 어느 때에 존재하는지를 파악함으로써 물건의 상실이 가능성의 세계에서 확실성의 세계로 굳건해지는지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을 테다.

 

 가. 물건을 잃어버릴 때에만 한시적으로 발생

물건은 잃어버리는 사건과 블랙홀의 성립이 일치하는 사건이거나, 혹은 적어도 필연적인 인과관계로 병립하는 사건일 경우이다. 상실의 즉각적 해소를 위해 블랙홀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는 설득력 있는 가정이다. 상실 가능성이 확실성으로 변환된 후, 상실된 사물이 소유의 임시 주체로서의 블랙홀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상실이 해소되는 과정이 모두 시간선의 한 점 위에 자리하게 된다.

 

 나. 물건을 잃어버리는 순간과는 별개로 간헐적 발생

이는 상실의 실천적 확립를 바탕으로 이어지는 상실의 해소, 그리고 상실의 가능성의 세계가 어긋나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블랙홀이 필수적인 이유였던 '상실로 인한 불연속성의 즉각 해결'을 달성할 수 없기에 적절치 않다.

 

 다. 항상 존재 유지

이 경우에 물건은 항상 잃어버림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으며, 언제나 확실한 상실의 세계로 치환될 수 있다는 관점이나 다름없다. 여기까지는 목차 3.가.와 결과론적으로 동일해보인다. 그러나 블랙홀의 존재가 항구적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은 가능성에서 확실성으로의 즉각적 치환을 넘어서서, 상실이 가능성의 영역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확실성의 영역은 여전히 개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확실성의 세계가 가능성의 세계 이후뿐 아니라 이전에도 존재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존재는 점진적 증가라는 단선적 방향성만을 표출할 수 있으며, 그 역순이 성립할 경우 불확실성의 기회를 열어두어 존재자 간 관계성의 존립을 저해한다. 그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블랙홀의 존재를 필수적이라 판단한 상황에서 오히려 블랙홀의 존재가 구조적 불안정성을 초래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따라서 본 항목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목차 3에서는 항목 가만이 블랙홀의 발생 시간에 대한 적절한 분석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잃어버린 물건들의 블랙홀은 물건을 잃어버리는 순간마다 즉각적으로 발생하며, 실존의 불연속성 해소라는 소기의 목적을 다한 후에는 존재하기를 일시 중단할 것이다.

 

 

 

4. 블랙홀의 위치

 가. 물건을 잃어버린 장소

이는 상실과 집결이 일치성을 띠게 된다는 점에서 존재의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위치가 곧 존재의 성질 그 자체로 연결되는 이유는, 소유관계는 그 위치로 인하여 대상과 주체가 정립되기 때문이다. 이때 위치는 단순하게 물리적인 실체의 장소만은 아니다. 오히려 물리적 위치는 소유관계의 정립에 혼란을 끼치는 저해요인이다.  본 논의에서의 '위치'란 '그 물건이 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존재자로서의 자리'이다. 모든 물건과 그 주체는 세상의 현상태에 왜곡을 가할 잠재력을 지닌 실체로서의 존재자이다. 그들이 위치의 집합이 세상의 현 상태를 이루고 있으므로, 사물 혹은 貞과 같은 소유의 주체의 위치가 각 개체의 성질의 설명물로 기능함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물건을 잃어버린 장소' 역시 단순한 물리적 실체로서의 장소는 아닐 테다. 그보다는 물건이, 비록 블랙홀을 통해 즉각적으로 해소되는 상실이지만, 그 상실로 인해 존재자로서의 지위를 놓치기 직전에 자리하던 곳을 의미한다. 

 

이 경우가 성립하는지 알기 위해, 우리는 존재의 일관성 부여가 블랙홀의 위치 선정에 기여하는 요인으로 작용할지를 확인해보아야 한다. 물건이 상실되기 이전과, 상실되었다가 즉각적으로 존재의 연속성을 되찾은 이후에, 세상에서 차지하는 존재자로서의 성질이 상동할 필요가 있다면 블랙홀은 물건을 잃어버린 장소 좌표에 그대로 발현할 것이다. 상동성의 충족은 이미 검증된 구조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그러나 새로운 존재적 성질의 달성이 무조건 불균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필수적이지는 않다.

 

나.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은 장소

1)에서 논의된 세상에서의 한 존재자로서 가지는 자리로서의 위치 개념을 원용했을 때, 이 경우에는 상실과 집결을 겪으며 물건의 성질은 완전히 변이하게 된다. 물건의 기존의 위치 집합과의 여집합으로서 블랙홀이 존재하므로, 블랙홀에 잃어버린 물건들이 재집결함으로써 곧 해당 물건들이 '잃어버림'이라는 새로운 경험적 특질을 부여받음으로서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이전과는 다른 위치에 정립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상실과 집결은 기존 소유관계의 완전한 해체와 재구성이므로 그 이전과 이후의 동일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본 논의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기존에 균형잡혀 있던 구조가 변동하고 새로운 연결성을 맞이한 결과가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 사전적 통찰이 불가하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다. 독립적인 장소

이때 물건의 상실은 물건의 재집결 장소와 0의 상관계수를 지니게 된다. 무관계성이란 '다르다'의 차원을 넘어, '같든 다르든 그것이 세상에서의 해당 위치에 있어서 아무런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두 가지 설명으로 뒷받침될 수 있다. 이전과 다른 위치를 지니는 것이 알고 보면 세상의 구조적 균형에 아무런 위협을 가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불균형이 발생하더라도 사후적 조치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목차 4에서 탐구한 결과 물건을 잃어버린 장소이든 아니든 각각의 장단점이 존재하였다. 어느 하나가 우선적으로 택해질 것이라 생각하기보다는 두 경우가 무차별하므로 물건의 상실과 재집결은 위치적 상관관계가 크게 의미없다는 결론으로 수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즉 항목 다에서 말한 위치적 독립성을 수용하고자 한다.

 

 

5. 블랙홀, 그 후

이상으로 미루어보아, 우리가 물건을 잃어버릴 때마다 블랙홀이 발생하여 소유관계에서 임시적 주체 역할을 맡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더하여, 목차 4에서 블랙홀의 위치를 논하며 언급한 균형 유지의 사후적 조치에 대해 부언하고자 한다. 만약 貞이 잃어버린 물건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블랙홀을 통해 존재의 연속성이 이미 상실 이전과 동일한 성질로 충족되어 기존의 위치 회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잃어버렸던 물건이 다시 돌아온다면 블랙홀을 통해 존재의 불연속성은 해소되었으나, 그렇게 맺은 새로운 소유관계 속에서 물건의 위치가 기존과 달라 불균형이 발생하자 관성적으로 본래 성질을 되찾고자 한 결과일 테다. 즉, 블랙홀로 집결된 이후에 물건들의 거소는 집결의 결과물이 세상의 존재자 간 새로운 연결성 형성과 구조의 안정화에 긍정적으로 기여하였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리라 생각할 수 있다.

 

물건의 상실이 자의적 행위의 결과물인 경우를 잠시 제쳐놓는다면, 대부분의 貞들은 블랙홀에서의 위치 재배정이 불안정하여 다시 물건이 원래의 자리로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안정화가 복잡한 단계를 거치며 달성되는 것보다는 하나의 단계로 완성되는 것이 유익할 텐데도 그러하다. 이처럼 존재자 전체를 하나의 집합으로 보았을 때의 이익과 각각의 존재자로 분리하였을 때의 이익이 서로 유리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존재의 집합이라는 특성이 가져오는 새로운 성질의 구체적 양상은 이후의 탐구에서 보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

*이는 某 고교 학급 분류법의 차용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차용한 표현 및 개념을 글에 다수 적었으나, 작성자는 그의 철학 공부 같은 건 한 적 없다. 하이데거가 기존에 각 단어들에 부여한 존재론적 의미보다는 단어의 외면에서 암시되는 의미로, 다시 말해 임의로 마구 사용했음을 밝힌다! 

***문장에서 어째 종교적, 아니 종교적 색채가 풍기는 듯하다면 아마 착각일 것이다.


생각의 출처 : 고무줄 머리끈 100개입을 다이소에서 샀는데 어느 순간 다 쓰고 없어서.. 그 많던 머리끈이 다 없어지려면 우리집에 블랙홀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고 생각함.

참고로 지금은 머리끈 새로 사서 채워넣었다. 다이소 고무줄 머리끈 100개에 천원-

가오나시 손가락인형은.. 대충 문진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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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완벽한 꺾어진 각도는 무엇일까? 불명확한 언어의 나열에 그치는 것이 아닌 구체적인 수치를 도출해내고자 한다. 만약 외부 환경에 따라 변동적인 결과가 발현된다면, 외부 상황을 변수로 가지는 특정한 공식을 유도해낼 것이다.

 

- 완벽함의 개념적 분야에 따른 구분

가장 완벽하게 꺾어진 각도란 미적인 개념일까? 혹은 수학적, 어쩌면 종교적 개념일까? 이는 각각의 분야에서 '완벽', '꺾어지다', '각도'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1. 미적인 개념일 경우

'완벽'은 미학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극치가 된다. 이데아 그 자체의 달성이나, 자연의 완전한 모방, 완벽한 객관적 지각을 가져다주는 진리, 혹은 자유로운 상상을 일으키는 즐거움으로서의 美까지. 그것도 아니라면 '규정된 미'는 없고 그저 개개인의 인식에 따라 변이하는 주관만이 美를 야기한다고 볼 수도 있다.

'꺾어지다'는 감각적으로 갑작스러운 변화를 주는 모든 것을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직선이 아닌 구조의 물체부터 시작하여, 발레리나가 유연성을 뽐내며 음악에 맞춰 신체를 구부리는 것, 음악에서 갑작스럽게 이질적인 효과음을 넣는 것, 혹은 연극에서 '극적인' 변화가 찾아오는 것까지. 

 

그렇다면 이러한 꺾어짐들에서 명확한 하나의 완벽한 '각도'를 도출해낼 수 있을까. 상술한 감각적 변화는 전부 起承轉結에서 轉의 시점이 '꺾어짐'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모두에게 그 轉의 순간이 명확해야 하고, 앞뒤의 承과 結과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시간선이랄 것이 따로 없는 정적인 작품의 경우에도 '작품을 본 순간의 충격'에 기승전결과 카타르시스의 특성을 대입해볼 수 있다. 

 

정리하면 미적으로 완벽하게 꺾어진 각도란 360도º의 각도 차원에 대입하였을 때 {(轉에서 충만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심상 - 기존의 심상) / 轉에서 충만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심상 } * 360º 이다.

 

2. 수학적 개념일 경우

'미분 가능하다'가 완벽일 경우 '가장 완벽하게 꺾어진 각도'는 미시세계의 범위에서만 가능하다. 미분가능성의 조건은 i)연속이어야 하고 ii)우미분계수와 좌미분계수가 동일해야 한다는 것 두가지이다. 따라서 '꺾어짐'이라는 속성은 일반적으로는 '완벽'과 양립할 수 없으며 오직 '무수히 잘게 쪼개져 연속이나 마찬가지인 꺾어짐'만이 완벽의 가능성을 지닌다. 이처럼 '무한'이 완벽일 경우 꺾어지는 것은 곡선 형태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혹은 그러한 곡선이 원을 그리듯이 빙 돌아 형성된 하나의 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이는 가운데에 무한히 얇은 막대기를 두고 끊임없이 휘감기는 무한히 얇은 실을 떠올리면 된다. 실이 그리는 각도가 무한대로서 반복된다면, 이는 결국 하나의 막대기에 계속하여 돌듯이 휘감기며 그 막대기를 위에서 내려다본 점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정리하면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꺾어진 각도란 0º = 360º 또는 n ->∞일때 lim nº = ∞º 로 나타낼 수 있겠다.

 

3. 종교적 개념일 경우

완벽은 곧 신의 존재에 닿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신성한 꺾어진 각도라고 치환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경우 차안에서 피안으로 넘어갈 수 있게끔 하는 空의 깨달음이 곧 신성함과 가깝다. 즉 空을 일정한 비율로서, 각도로서 치환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완벽한 각도가 될 테다.

크리스트교의 경우 예수의 형상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단순한 시각적 모습으로서 피에타 석상이나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을 떠올려도 좋겠지만, 이는 일차원적인 접근에 불과하다. '꺾어짐'과 유사한 크리스트교 개념은 - 비록 무신론자로서 알고 있는 성경 교리는 대학교 교양 수업 수준에 머무르지만 - 성경 및 예수가 무척이나 강조하던 광의의 사랑이 있을 텐다. 이는 신, 이웃, 더 나아가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예수와 같이 타자를 자신만큼이나 사랑할 때 비로소 옳게 행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과 현재의 인류애 간의 차이가 완벽한 각도로서 존재할 것이다.

힌두교의 경우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관계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브라흐만은 세상의 궁극적인 실체를 의미하고, 아트만은 개인의 진정한 자아를 뜻한다. 따라서 아트만이 곧 브라흐만에 닿을 때 인간은 깨달음을 얻는다. 따라서 기존의 아트만과 깨달음 달성 후의 아트만, 즉 아트만과 브라흐만 사이의 간극이 곧 '완벽하게 꺾어진 각도'의 힌두교적 의미가 된다.

 

정리하면 종교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꺾어진 각도는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신, 또는 해탈의 완전성으로 가는, 그 간극만큼의 변화일 것이다. 공식으로 표현하면 {(완전한 神성or해탈 - 불완전한 인간성) / 완전한 神성or해탈 } * 360º 이다. 

 

4. '존재'의 문제일 경우

세상 속에서 일정한 부피를 차지하고 있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의 존재일까? 모습이 인식의 구조물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완벽성을 논하기 위해 인식 이전의 존재 자체를 살펴봐야할지 모른다. 


부피를 움직이는 건 세상의 고정된 형태를 매순간마다 깨고 있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입자가 각기 다른 형태로 모여있는 것을 우리는 세상이라 착각하고 있다. 입자의 조합 간 견고함의 정도 차이에 따라 경계면이 발생하고, 그 경계면들의 집합을 세상이라고 본다면, 이 세상은 사실 미세한 가루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가루의 상태에 역동감을 부여하는 어떠한 성질을 가정하자. 설령 해당 성질이 운동성 없이 '고정된 상태'의 표출에 지나지 않더라도 형질적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내재한다면, 즉 꺾어져있다면, 세상의 존재를 깨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똑딱이 손난로에서 철 버튼을 똑딱일 때에 액상의 온도와 굳기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과도 이미지적으로는 유사하다. 물론 그것은 꺾어진 성질이 변화를 가져오는 눈속임일 뿐, 실제로는 '꺾는 행위'가 가한 충격의 결과물이라는 인과관계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다시, 꺾어진 상태에 놓인다는 것은 세상을 그 꺾음대로, 꺾어진 각도대로 휘감고 있는 것이다. 이는 소위 '지구 샌드위치'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서울과 완전한 대척점에 위치하는 아르헨티나의 동쪽 해안 도시 마르델플라타에서 각각 식빵 하나씩을 보도블럭에 내려놓으면, 가운데를 지구로 채워넣은 샌드위치를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세상을 휘감음으로써, 주체성의 위치를 기존에 대상화되던 소규모의 존재로 옮겨오는 방식의 하나이다.

 

즉, 세상을 자신의 존재로 인하여 명확한 영향을 끼치는 것, 단순히 세상에 하나의 被존재자로서 그 위치를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배경을 '배경'이 아닌 자신과 같은 '대상'으로서 만들어버리는 것이 존재론적인 '완벽함'일 테다. 그러므로 이를 달성하는 꺾어지는 각도는 세상을 자신의 자아로 휘감을 수 있는 정체성을 지녀야 한다. 즉, 내 존재에 따라 변이하는 세상을 가정할 때 그 변이의 정도가 극한까지 치달아야 한다.

 

정리하면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가장 완벽하게 꺾어진 각도는, 우선 비율로 구해보면 max( δ세상 / δ내 존재 )가 되게 하는 '내 존재'이므로 ( δ세상 / δ내 존재 ) / δ내 존재 = 0 이 되게 하는 '내 존재'이다. 이를 a라 두고 360º의 체계에 대입해보면 내 존재 = a 일 때의 ( δ세상 / δ내 존재 )* 360º 가 가장 완벽하게 꺾어진 각도가 된다.

 

 

- 완벽하게 꺾어진 대상에 따른 구분

혹은 '꺾어진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완벽함의 성질이 미묘하게 다른 의미를 띨 수 있을 테다. 다만 이는 대부분 위에 서술한 내용과 겹칠 수 있어 간략히 어떤 개념과 연결될 수 있는지만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1. 명확하게 물질적인 대상일 경우

이는 미적인 개념 중 일부 시각적으로 인지 가능한 2차원, 3차원적 작품과 유사하다.

 

2. 추상적이지만 시각적 형상을 부여할 수 있는 대상일 경우

이는 미적인 개념, 수학적 개념과 유사하다.

 

3. 완전히 추상적 개념 속에만 존재하여 '꺾어지다'라는 시각적 성질의 동사를 대입하려면 구상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대상일 경우

이는 종교적 개념, 또는 존재론적 개념과 유사하다.

 

 

- 한계점

그러나 아직 한계점이 남아있다. 위에서는 '가장 완벽하게 꺾어진 각도'를 '불완전성'에서 '완전성'으로 가는 변화의 과정으로 가정하고 서술했다. 즉 '꺾어짐' 자체가 '완벽함'을 띤다기보다는 '완벽함으로의 길'로서 서술되어있다. 자주 사용한 공식의 기본 형태를 가져와보면 {(완전성-불완전성)/완전성 } * xº, 이때 x가 곧 완벽함이다. 그렇기에 x 자체가 아니라 x의 일정 비율이 '가장 완벽하게 꺾어진 각도'로서 정의되었다. 그로써 '완벽함'은 360º로 가정되었으며 비율로서 '완벽하게 꺾어진 각도'를 구했다.

 

이러한 가정이 과연 맞을까? '완벽함'의 각도와 '완벽하게 꺾어진 각도'를 분리해서 서술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이는 본론에서는 '꺾어지다'와 '각도'를 거의 유사어로 사용한 것에 반해, 기본 가정의 측면에서는 '꺾어지다'라는 특성에 지나치게 차별적인 지위를 부여한 것이 아닐까?

 

- 해결 방안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은 크게 i) 그러한 가정이 괜찮다는 의견, 그리고 ii) 새로이 '완벽한 각도'를 정의내리자는 의견이 있을 테다.

 

i)의 경우에는 '꺾어지다'의 동작성에 주목한다. '완벽하다'라는 성질 자체가 아닌, '꺾어진' 각도이기에 '완벽함'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려는 앞에서의 서술이 옳다는 논리이다.

 

ii)는 어쨌거나 '꺾어진'은 문장에서 관형어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동작'보다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점에 주목한다. 따라서 이를 논리 전개에 반영하여 완벽하게 꺾어진 각도의 탐구 결과를 수정해야 한다. 즉 '완벽성' 자체를 특정한 각도로 찾아내어야지, 360º에 대한 비율로 나타내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위처럼 분야를 나누지 않고 통합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완벽하게 꺾어진 각도'는 없을까.

 

숫자는 추상의 의미와 물질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인식을 확대시키는 기반이 되어준다. 따라서 완벽하게 꺾어진 각도는 하나의 숫자로 나타내어도 충분히 추상과 물리의 의미를 전부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숫자가 무엇이 될지만 남아있다. 이는 흔한 업다운 게임을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우선 180º보다는 작다. 수평의 각도는 무한히 이어져도 결코 하나의 점으로 귀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90º보다는 작다. 수직의 각도는 평행축과 결코 닿지 않고 뻗어나간다는 점에서 타 개념과의 양립불가능성을 내재하기 때문이다.

45º보다는 작다. 이는 정사각형의 대각선이 지면과 그리는 대각선은 '정'의 형질의 온전한 지지자라는 점에서 결코 해당 형질과 분리되어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正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각도란 유연성을 결여하기에 모든 분야에 통합적으로 적용되는 '완벽함'과는 오히려 어긋난다.

업다운 게임을 보다 간소화하기 위해, '그렇다면 45º보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작을지'를 확인하는 단계로 나아가자. 

45º는 正의 속성에 지배된다는 점에서 부족했다. 그러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완전성의 상징인 3º라는 숫자를 제해줌으로써, '굳어있는 완전성'을 제거해주어야 한다. 이는 45º가 결여하던 유연성을 부여하며 '굳은 완전성'에서 '완전한 완전성'으로 한 걸음 도약하게끔 뒷받침한다.

이렇게 42º라는 값을 도출해낼 수 있다. 

 

따라서 완벽하게 꺾어진 각도는 42º가 된다. 다만 각도가 '오롯이' 42º일 필요는 없이, 42º의 성질을 어렴풋이라도 묻히고 있다면 이는 완벽하다. 그 꺾어짐 전체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일부의 특성이 완벽함에 닿아있다면 이는 곧 대상 전체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라면 위에서 공식으로서 정리한 꺾어진 각도처럼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서도, 일상적인 각도도 모두 완벽성을 내재할 수 있다. 시간이 언제나 인식의 합리성을 늦추거나 앞당기는 함정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잠재적으로 42º의 성질을 띤다면 이는 사실상 현재라고 불리는 비존재성의 순간에도 역시 42º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타이레놀을 먹은 뒤 알루미늄 포장지를 그 절취선을 따라 꺾어두었을 경우, 이는 잠재적으로 42º가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해당 타이레놀 포장지 역시 42º라는 측면에서의 완벽성을 표출해낸다. 


출처 : 공부하다가 옆쪽에 꺾어서 놔둔 타이레놀을 보고 생각남. 쟤(=타이레놀)는 이쁜데 완벽하진 않으려나? 라는 생각.

타이레놀의 꺾어짐.... 위쪽의 찢겨나간 형상과 아래쪽의 단정한 흰 타원형 3알이 대비를 이루어 묘하게 만족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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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 김홍도

 

하얀 옷자락이 펄럭인다. 수분을 머금은 모래 덩어리는 거세게 부딪히는 발아래에서 짓눌린다. 나는 눈을 감는다. 함성과 거친 숨소리를 귓가로부터 밀어낸다. 그리고 가만히, 가만히 침전한다. 저 모래 속으로, 눅눅하게 서걱거리는 차가움 속으로. 서로의 바지춤을 잡고 씨름하는 선수들 밑, 무겁도록 서늘한 대지 안에 어느새 나는 있다. 양쪽 귀가 먹먹해진다. 쭈그려 앉는다. 고개를 파묻는다. 점점 더 모래로 덮여가는 나를 꺼낼 수는 없다. 선수들의 발밑에서 다져지는 토양, 튀기는 모래알. 그 모든 것은 저어 위에서 숨쉬고 나는 여기에 존재한다. 다시 박차고 올라가기엔 축축해진 흙이 가슴을 눌러 숨을 쉴 수 없다. 언제까지나, 어쩌면 언제부터나

 

딱히 씨름을 구경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여기 앉아있었을 뿐인데 사람들이 오고 판이 벌어지고 늘 동네를 돌아다니는 엿장수 아이가 오고 씨름이 시작되었다. 시끌벅적하다. 북적이는 분위기 속에서 떠도는 존재는 홀로 가라앉는다. 씨름장으로부터 약간 뒤편에 앉아 희멀건 시야로 앞을 쳐다본다. 저 선수들. 벌개진 얼굴과 솟아난 힘줄에서는 열정의 색채가 진동하고 있다. 순간으로 충만한 그 색채를 나는 바라보는 것일까. 하지만 침전하는 시야에서는 현재의 박동조차도 뿌옇게 흐려져 울릴 뿐이다. 활기찬 분위기 속에 나는 있다. 그렇기에 더욱 활기찬 분위기 속에 나는 없다. 씨름하는 저 선수들처럼 공기의 성정을 뒤틀고 흔드는 힘을 발휘하고 싶은 것일까. 결국 차가운 모래에 파묻히리라는 걸 아는 자의 몸부림에 불과할 텐데.

 

씨름 후는 공허하다. 일부러 그 공허함을 마주하려던 것 역시 아니었다. 그저 처음과 똑같이 여기 앉아있었을 뿐인데 사람들도 엿장수 아이도 선수들도 그 열기도 함성도 색채도 박동도 모두 떠나갔다. 채워져 있던 존재만이 지워질 수 있기에 가득 차 있던 씨름의 시간은 더 큰 허무함으로 귀결됨이 분명했다. 모두 이렇게 허무함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삶인가. 나는 어쩌면 기쁘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러나 하강하는 기쁨이 침전하는 나를 끌어올려 줄 수 없음은 당연하다.

 

이곳에서는 또다시 씨름이 열리겠지. 그 열기와 작열하는 힘. 그리고 나는 그때에도 여기에 가만히 있을 테다. 모래의 찬 기운은 다시금 나를 둘러싼다. 그 습한 기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아니 그것조차 아닌가. 습기가 나를 잠식하도록 가만히 있을 뿐인가. 위에서는 함성이 들린다. 그 함성을 밀어내려 더욱 고개를 숙이고 먹먹한 토지 속에 나를 가라앉힌다. 언제까지고.

 

-씨름을 보며

 


문학글 게시판도 따로 만들까 하다가 말았습니다. 씨름도를 보고 흔히 느끼는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글을 적어보고 싶었던 결과물입니다. 나중에 작곡을 배우면 가사로 써먹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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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미셸 루트번스타인의 <생각의 탄생>을 읽고 쓴 글. 대략 일주일 전 학교 수업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이것도 생각글 아카이브에 포함시킬만한 내용인듯 하여 옮겨와봅니다. 학기 다 끝나고 올릴까 하다가 걍.. 여기 올리는 건 자기표절에도 안 속할 듯 하여... 올려버리려고요^^ 

본래는 책 3권, '생각의 탄생',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라', '젊음의 탄생, 대학 2.0시대'..에 대해 팀원마다 한 권씩 맡아서 쓴 글이었지만, 본 티스토리에는 제가 담당했던 '생각의 탄생'만 올립니다. 서론도 제가 쓴 거라서.. 서론도 같이..)

 

제가 고안해본 '생각의 물질화' 개념에 대한 글입니다. 과제용이라 본 게시판에 전에 썼던 오징어회의 오징어性 관련 글보다는 훨씬 평이한 내용이지만... 그래도 최대한 쓸데없는(?) 생각을 담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나의 뻘소리를 정규 수업 시간에 발표할 수 있는 기회... 그것도 무려 200명 앞에서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라는 심정으로 썼죠 ㅎㅎ

 

많관부

 


.서론

 

 본 글에서는 로버트미셸 루트번스타인의 <생각의 탄생>, 마이클 겔브의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라>, 이어령의 <젊음의 탄생, 대학 2.0 시대> 3권의 책을 통해 현대 사회이기에 나타나는 생각의 특성들을 탐구할 것이다. 해당 책들은 모두 사고의 방법론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당 책 3권 속 생각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범용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일지, 혹시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현대 사회라는 특정적 상황 속에서 일종의 변형 또는 재적용이 일어나거나 특이한 양상을 띠게 되지는 않을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생각이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고찰은 현대 사회의 숨 가쁜 변화를 의사결정에 누구보다도 빠르게 반영해야 하는 경영학의 입장에서도 중요하다고 판단되며, ‘왜 경영학도로서 철학을 탐구해야 하는가와도 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라는 시대적 특성이 생각에 미친 영향을 확인하기 위하여 현대 사회의 기술’, ‘현대 사회의 미술’, 그리고 현대 사회의 사상이라는 세 가지 분야에서 드러나는 특성을 논의할 것이다. 현대 사회 전반에 대한 포괄적인 영향을 찾는 것보다는 위와 같이 구체적으로 분야를 특정하여 살펴볼 때 보다 현대 사회의 특징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기술이라는 가장 물질적인 영역에서 출발하여 사상이라는 가장 추상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라는 특성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면, ‘사회 전반에 대해서는 살펴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오는 포괄성의 부재를 일정 부분 보완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이를 위해 본 글은 현대 사회의 기술 분야에서의 생각의 물질화’, 미술 분야에서의 혁신적 사고’, 사상 분야에서의 새로운 유형의 세대 갈등을 살펴보며, 각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본 뒤 구체적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제가 쓴 파트인 현대사회의 기술만 다룰 예정이죠. 그것이.... 저작권이니까☆)

 

. 본론

 

1. <생각의 탄생>에서 제시하는 생각의 기법

 

기껏 도서관 가서 빌려왔더니.. 집 책장에 떡하니 꽂혀있던 책

 

 “누구나 생각한다. 그렇지만 누구나 똑같이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루트번스타인, 20면)” 

 

 책 <생각의 탄생>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즉 생각의 기법에 대해 논하며, 지식의 제반 분야를 통합하여 인간의 상상력을 확장하는 전인성을 충족하는 인간을 지향한다. 전인성의 달성을 위해 저자들은 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인식, 패턴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 만들기, 놀이, 변형, 통합, 13가지의 창조적 사고의 도구들을 제시한다. 이 중 형상화는 이미지를 활용하는 시각적인 사고를 뜻하고, ‘감정이입은 문제가 되는 대상의 관점에서 직접 생각해보는 것, ‘차원적 사고2차원의 것을 3차원으로 또는 그 역으로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위의 사고의 방법들이 현대 사회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적용될까. 사고의 13 기법은 현대 사회의 기술과 결합하며 생각의 물질화라는 새로운 양상을 가진다고 본다.

 

 

2. 현대 사회에서 생각의 특성으로서의 생각의 물질화

 

. ‘가상현실의 경로 발생

 

 사고의 13 기법이 생각의 물질화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적용되는 현대 사회의 특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우선 13 기법을 가상과 현실 간 상호작용의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제시한 관찰, 형상화, 추상화 같은 위의 13가지 도구들은 모두 생각으로 귀결된다. 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인식, 패턴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 만들기, 놀이의 11가지는 대체로 현실에서 생각으로의 연결이라고 볼 수 있다. 남은 2가지인 변형과 통합은 생각 상호 간의 연결을 일컫는 개념이다. ‘모형 만들기의 경우에는 모형을 직접 만들어 발상하는 방안이라서 생각에서 현실, 그리고 다시 생각으로 이어진다고 볼 여지가 존재하지만, 결과적인 방향성은 생각으로 귀결된다. 정리하자면 책에서 논하는 생각의 기법들은 현실생각’, ‘생각생각의 상호작용이며, ‘가상을 보다 넓은 의미로 확장하면 생각도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반영하면 현실가상’, ‘가상가상의 상호작용이라고도 치환할 수 있다.

 

 그러나 기술 발전이 가져오는 특성 중 가상과 현실이 교차한다라는 점으로 인해, 현대 사회에는 가상현실의 경로가 추가된다. 이것은 제3의 경로라기보다는 앞서 말한 두 가지 경로 뒤에 이어지는 경로이다. 사고의 13 기법으로서 이루어진 생각을 이제는 기술이 발전으로 인하여 현실에 물질화하여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생각의 물질화..를 처음 언급한 ppt 페이지

 

 

. ‘생각의 물질화의 구체적인 개념

 

 그렇다면 생각 자체의 구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알아보자. 이는 생각한 것을 실천한다와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실천은 생각을 원천으로 하여 파생된행위의 결과물이 사람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표출하는 것이라면, ‘가상현실의 경로는 생각 그 자체가 물질화된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컨대 쿠키를 먹어야겠다라고 생각한 뒤 먹기를 실천하는 것과, ‘쿠키를 먹어야겠다라는 생각 자체를 어떤 방식으로든 실물로 구현하는 것은 다를 테다. 이때 구현의 방식은 생각의 주체가 되는 사람이 선택하는 바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앞서 비교한 생각의 실천과도 결과적으로 같게 나타날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결과적 동일성이 그 행태 자체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정립은 1인칭의 나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생각 주체의 인식에 따라 생각의 실천인지 혹은 생각의 물질화인지, 그 성격이 정해진다.

 

생각 주체를 사람으로 설명하는데 그림은 고양이네... 착한 사람 눈에는 사람으로 보임

 

 <생각의 탄생>에서 제시된 생각의 13 기법 중 형상화와의 차이 또한 명확히 밝히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생각을 시각적으로 확인 가능한 개념으로 만든다는 특성을 공유하므로 개념의 혼란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형상화생각의 물질화는 영역의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생각이라는 영역 내에서의 이미지화, 후자는 영역 간 이동으로 발생하는 이미지화이다. 기존에는 쉽게 영역을 이동할 수 없어 생각 내에서만 이미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였으나,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상대적 현실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탄생하며 물질화가 더욱 수월해졌다. 후술할 메타버스 등이 그 영역의 사례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물질화로서의 생각의 구현은 아직 불완전성을 띤다. 현대의 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생각과 완벽히 동일하게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대적 현실로 이동하는 과정이 따로 존재하고 그 도중에 왜곡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완전한 생각의 물질화는 현재로서는 다소 이상적인 개념으로만 존재한다. 다만 앞으로 더욱 기술이 발전하여 뇌에서 인식하고 있는 내용을 그대로재현하는 기술이 발명되고 상용화된다면 가능할 수도 있을 테다.

 

 또, 기존에는 생각의 물질화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는지가 의문으로 떠오를 수 있다. 예컨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도 일종의 생각의 물질화이지 않냐는 의문이다. 광의의 물질화로서는 옳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앞에서 생각의 물질화가 불완전하다라고 표현한 것과 관련 있다. 도화지에 그림 그리기는 무척 제한적인 차원에서의 물질화이다. 일면적이고, 구현의 즉각성도 결여되는 측면이 있고, 주관이나 표현력에 제한받을 가능성도 크며, 왜곡의 정도가 크고 개인의 숙련도가 일정 이상 올라야 한다. 따라서 범용적이고 일상적이기에도 한계가 있다. 종합하자면, ‘어떤 시대의 특성이라고 말할 정도의 위상을 지니지 못했다. 그러한 요소들을 극복해내고, 생각을 구현해내는 데에 시대적인 특성으로서 어떠한 양상이 나타났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한 일정 한계선의 달성은 적어도 현대 기술의 발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고 본다.

 

 

. 기술적 사례 : 메타버스와 3D프린터

 

 가상의 세계와 구현된 세계가 분리되지 않는 현대 사회에 대한 가장 직관적인 예시로는 메타버스와 3D프린터의 등장이 있다.

 

코트가 사고 싶어서 만든 제페토 아바타.. 결국 그저께 베이지색 코트를 샀다

 

 메타버스는 가상과 현실의 특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실제 세상과 비교하면 감각적 상호작용이 부족한 세계로서 가상이지만, 생각과 비교하면 눈에 보이는 실체로서 현실이다. 메타버스는 상대적 현실’, 실제 세계는 절대적 현실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이렇듯 물질화의 측면에서 상대적 현실차원에 머무르지만, 기존에 생각’, ‘상상의 영역에만 머무르던 개념을 메타버스 기술을 통해 실현해낸다.가상의 나를 아바타로 꾸미는 것이 그 사례이다.

 

 이때, 이러한 메타버스에서의 활동은 그저 앞서 언급했던 생각의 실천의 일환이 아니냐는 의문이 존재할 수도 있다. 이는 메타버스를 이용하는 각자의 의도에 집중하여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메타버스에서 갈색 코트를 입어야겠다라고 생각하여 갈색 코트를 아바타에 입힌다면 그것은 생각의 실천일 것이다. 반면 갈색 코트를 입는다라는 생각 자체를 구현하여 갈색 코트를 입은 아바타를 만듦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실체로 확인하는 것은 생각의 물질화이다. 결과적으로 같은 행태로 나타날지언정, 어떠한 의도와 의미를 부여했는지에 따라 갈색 코트를 입은 아바타라는 존재는 서로 다른 두 가지로서 정립된다.

 

아빠방에 있던 게코도마뱀 3D프린트물 스윽 가져와서 찍음

 

 3D프린터는 생각을 말 그대로 물질로 구현하는 방식으로 생각의 물질화를 달성한다. 3D모델링 툴을 활용하여 생각을 동시적으로 상대적 현실인 화면 속 실체로 옮기고 3D프린터를 통해 이를 절대적 현실인 실물로 옮긴다. 사고의 13 기법 중 모형 만들기와 다른 점은, 3D프린터는 생각의 원천으로, 즉 인과관계에서의 원인으로 삼기 위한 실체화가 아니라 생각을 구현해내는 결과론적인실체화라는 점이다.

 

 위의 메타버스와 3D프린터의 사례를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이제는 현대 사회의 기술에 힘입어 기존의 감각-인지-이해의 생각 과정이 감각-인지-이해-물질화의 과정으로 연장되었다. 다만 아직까지는 생각에서 상대적 현실을 거쳐야만 절대적 현실로 오는 양상이 보이는 등 불완전한 면이 잔존한다. 이러한 단계적 전이의 필수성과 같은 불완전성이 해소될 수 있을지는 앞으로는 기술적 발전에 달려있을 것이다.

 

 

3. 현대 사회에서의 전인성달성을 위한 통합교육

 

다방면으로 알아야 창의성도 길러지고 전문가도 될 수 있다,, 뭐 그런 느낌

 

 <생각의 탄생> 책 말미에서는 창조적 사고를 직조하여 통합적 이해를 달성하기 위한 ‘통합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한 우물만 파는 방식의 ‘전문가가 되기 위한 교육’이 아닌, ‘전인성’을 달성하는 박식한 사람을 만드는 교육을 한다면 이를 통해 결국 전문가도 될 수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요지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논의한 사항을 바탕으로 볼 때, 저자들이 지향하는 ‘전인적 인간상’은 현대 사회에서는 어떤 양상으로 나타날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생각이 물질화된 영역으로 확장되어 전개된다는 관점에서 전인성의 개념 자체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인성을 획득하는 방법 측면에서 현대 사회의 기술이라는 요소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점차 중요해진다. 기술의 영역에 능숙한 사람이 생각에도 능해지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즉 소위 ‘MZ세대’라는 말로 일컬어지는 현대 사회의 젊은 층은 전인적 인간상에 도달하는 방식 자체가 다른 세대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시대의 ‘통합교육’도 그에 맞춰 달라져야 할 테다.

 

 


참고문헌

로버트 루트번스타인·미셸 루트번스타인, <생각의 탄생>, 에코의 서재, 2007

 

김승호, 생각의 탄생의 통합교과적 함의, 통합교육과정연구12.2, 한국통합교육과정학회, 2018

쉬레야스 레디, '후보 소개부터 선거 토론까지'... 메타버스의 미래 보여준 한국 대선, BBC NEWS, 2022.03.08, 2022.03.21, <https://www.bbc.com/korean/features-60638940>

배윤경, 메타버스 심드렁 하다지만 양대 포털은 가속도, 매일경제, 2022.02.22, 2022.03.21, <https://www.mk.co.kr/news/business/view/2022/02/17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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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는 주석 표시이므로 글 하단을 참조하기를 바람.

 

-오징어라는 단어에 한정성을 부여하다

 

누군가 '오징어회는 회가 아니라 그냥 오징어다'라고 말을 한다면

그에 대한 답변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테다. 

 

"오징어회가 회가 아니라 그냥 오징어라면, 삶은 오징어는 오징어가 아니다"

(이 답변은 반박의 의미를 내재한다기보다는 순수하게 담화의 건네받기라고 봐야 한다.)

 

삶은 오징어는 오징어에 첨가된 의미의 부스러기를 지닌, 살풋 하위(어쩌면 상위)의 존재이거나 혹은 오징어와는 첨예하게 다른, 별개의 존재여야 한다.

오징어회가 그냥 오징어라고 말한 그 순간부터 오징어라는 단어에는 포괄적인 범용성이 사라지고 '그냥'이라는 부사어의 구어체적 함의에 종속된 한정적인 의미만이 남을 뿐이므로, 오징어회라는 의미가 오징어라는 단어를 선점한 이상; 혹은 오징어라는 단어가 오징어회라는 의미를 선점한 이상, 삶은 오징어는 더이상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오징어'가 아니게 된다.

 

어쩌면 오징어회와 삶은 오징어가 '모두' 오징어일 뿐이라는 의견을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이 문장이 성립하려면 오징어회와 삶은 오징어가 완전하게 동일한 개념이거나, 오징어가 오징어회와 삶은 오징어 모두의 상의어여야 한다는 점을 바탕으로 그 타당성을 판단해보자.

먼저 전자의 경우, 둘은 완전하게 동일한 개념이 될 수 없다. 전자는 '삶은 오징어는 삶은 게 아니라 그냥 오징어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는 삶았다는 표현에 대한 부인이다. 그러나 '회'는 그 자체로 특정 상태를 표출하는 단어인 반면 '삶은'은 삶는다는 행위를 통해서야 비로소 상태에 이른다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삶았다는 표현을 부인하는 것은 삶는다는 행위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행위와 동일시하는 태도, 즉 有와 無가 같다는 태도이기에 옳지 못하다.

후자의 경우, 오징어는 오징어회의 상의어가 될 수 없다. 그저 "오징어회는 오징어다"라고만 단언하는 것을 넘어 "회가 아니라 그냥 오징어다"라고 말함으로써 '회'의 속성은 부인되고 '오징어'라는 속성만이 오징어회의 존재를 설명하는 전부가 되었다. 원래는 상하의어 개념으로 통용되는 관계였을지언정 상하를 구분짓는 구체성의 부여 도구가 그 의미를 잃는다면, (구)상의어는 (구)하의어와 동치로 변환되고 만다. 

 

결국 삶은 오징어는 더 이상 포괄적인 의미의 오징어가 아니라는, 앞에서의 결론으로 되돌아온다.

 

 

-삶은 오징어와 포괄적 오징어의 의미상 상관관계 : 차별적인 부분

 

그렇다면 '삶은 오징어'라는 단어 속 '오징어'와 '더 이상 오징어가 아니게 된다' 라는 문장 속 '오징어'의 의미 역시 달라진다. 둘은 같은 거죽을 공유할 뿐인 상이한 존재이다. 이때 그 거죽은 적어도 오징어향은 날까? 다시 말해 관념적으로 통용되는 오징어라는 의미의 잔재가 남아있기는 할까? 하지만 일단 잔존하는 것보다는 변모한 요소에 초점을 두고자 - 이 점은 잠시 넘어가보기로 한다.

 

같은 형상을 띤 존재의 동일시되지 않는 면을 찾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음에도, 논의의 편의라는 얄팍한 목적을 위하여 전자를 오징어 , 후자를 오징어 숙*이라고 일시적으로 환가한다면

잠시 언급하고 지나갔었듯이 은 과 상하의어 관계일지 혹은 아예 단절된 성상을 보일지도 중요하다. 둘의 관계성으 파악하는 것은, 오징어라는 단어에 의미를 불어넣음으로써 근원적으로는 하나였던 단어가 어디까지 세분화되어 존재하게 되는지를 추적하는 과정으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앞의 '삶은'의 기능을 탐구해야 한다. 삶는다는 행위는 그 존재의 기반에 어느 정도의 변화를 가져오는가? 내재된 본질을 저해하는 행위인가, 혹은 속성을 덧칠하는 것에 불과한가? 어쩌면 '삶다'를 행위가 아닌, 2차원의 텍스트가 오징어라는 단어의 전면부에 부가된 것으로서만 수용해야 하나?

 

첫째로, 만약 삶다라는 단어가 오징어의 존재에 근원적인 진동을 가져온다면 은 단절되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행위를 통해 근원에 닿아 그 연결성이 끊어지는 것은 의외로 쉽기 때문이다.

 

둘째로, 만약 삶다라는 단어가 속성의 덧칠에 불과하다면 의 하의어이다. 하의어는 그 의미적 구체성의 차원에서 상의어를 뛰어넘는다는, 얼핏 보면 모순적인 속성을 지닌다는 사실에서 도출된 결론이다. 문제는 애초에 의 하의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글 첫머리에서 오징어회가 오징어라는 단어의 의미를 선점함으로써, 삶은 오징어는 오징어로서 존재할 기회를 빼앗겼다. 따라서 오징어()는 삶은 오징어()의 상의어가 될 수 없다. 그것이 본 글의 가정의 시작점이었으므로. 

반면에 이 의 상의어가 될 수는 있다. 얼핏 불가능해보이지만, 에는 변화가 부재한다고 단정할 수 없기에 가능하다. 단어의 의미가 비틀어지고 변동하는 것은 오롯이 상대성에 기반을 둔다. 겉보기에 이 그대로더라도 이 변화했다는 바로 그 상대적인 상황이 에 변화를 가져왔을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더욱이 이 경우는 글 첫머리의 가정과 대립되는 지점도 없어서 오히려 더 합리적이다.**

 

셋째로, 만약 삶다라는 단어가 오징어라는 단어의 앞에 붙여진 수식언일 뿐이라면 은 별개라고 착각되었을 뿐인 동의어이다.***그러나 우리는 앞서 오징어회는 오징어라는 사실을 가정했고, 오징어회는 삶은 오징어와 동일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이를 엮으면 오징어는 삶은 오징어와 동일하지 않게 된다. 즉 과 동의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거나, 이 불확정적으로 의 상의어라는 결론이 나온다.

 

 

-삶은 오징어와 포괄적 오징어의 의미상 상관관계 : 공통적인 부분

 

서 넘어갔던 논점, 바로 이라는 거죽에 공통되는 오징어향의 잔재가 남아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기울여보자. 다시 한 번 상기하자면, 은 '삶은 오징어'라는 단어 속 '오징어'였으며 은 '더 이상 오징어가 아니게 된다' 라는 문장 속 '오징어'였다.

 

이는 '공통되는 오징어향'이라는 표현 속 오징어를 '공통성'으로만 그 의미를 한정지은 제3의 단어로 봐야 할지, 혹은 모든 오징어를 포괄하는 단어라서 공통성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 할지에 따라 달라진다. 앞의 경우는 이라고 부르겠다.* 그리고 뒤의 경우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하는 '오징어'일 것이므로 오징어α(오징어 알파)라고 칭하겠다. 각 경우에 , 또는 오징어α,과 병존 가능하다면에는 공통되는 부분이 존재하겠고, 병존이 불가하다면 오직 차별성만이 있겠다.

 

우선 명이 정, 숙과는 별개의 의미를 지닌 '공통성'이라는 특이 요소라고 가정해보자. 잠시 여기서, '공통성'인 을 추출해냈는데 어째서 '특이하다'라는 표현이 쓰였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청포도사탕 속 초록색과 무지개의 초록색은 공통적으로 '초록색'이지만 청포도 사탕이나 무지개 그 자체와는 별개임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 경우에는 과 단절되어있든, 상하 관계이든, 동의어이든 상관없이 은 존재한다. 의 의미 자체가 '추출된 공통성'이므로 강제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립한다는 사실이 결과론적인 이유이고, 단절 또는 상하 관계가 '모든 차원에서의' 단절 또는 상하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원인론적인 이유이다. 예컨대 오렌지와 필통은 의미적으로 단절되어있다. 그럼에도 오렌지와 필통에는 공통점이 존재할 수 있다. 도 마찬가지이다.

 

이번에는 오징어α, 즉 확실한 포괄성을 품었다고 가정해보자. '공통되는 오징어향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상위의 단어가 하위의 단어에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이 된다. 이 의 상의어라면 과 오징어α는 동의어가 되고, 이 경우 오징어α의 존재 조건인 '확실한 포괄성을 가진다', 즉 '상의어이다'와 오징어α의 성질 가정인 '과 동일하게 상의어이다'가 동일하므로 오징어α는 존재할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앞에서 논의한 바 있듯이, 의 상의어가 될 수 없으므로 해당 가정은 기각되고, 오징어α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이 단절되어있다면 오징어α만이 상의어이며 은 그에 종속성을 띨 테다. 이 경우 오징어α는 정과 숙의 관계와 동일해지므로, 단절되어있다. 이는 바로 앞문장의 '오징어α만이 상의어이다'라는 가정과 전면적으로 모순이 되어 오징어α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이에 공통점이 존재함이 확실한 것은  '공통되는 오징어향'의 오징어가 일 때에만 가능하다.

 

 

 

-다시, 오징어회로

 

처음에 우리는 '오징어회는 회가 아니라 그냥 오징어일 뿐이다'라는 표현에 대한 대응으로서 삶은 오징어를 가져왔었다.지금까지 나온 결론을 정리하고, 등으로 일시적인 환가가 이루어졌던 표현을 원래대로 복귀시키면 다음과 같다.

 

- 삶은 오징어는 포괄적 의미의 오징어가 아니다.

- 삶은 오징어과 포괄적 의미의 오징어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거나, 삶은 오징어가 불확정적으로 포괄적 의미의 오징어의 상의어이다.

- 삶은 오징어와 포괄적 의미의 오징어 사이에 공통점이 존재하려면 해당 '공통점'이 공통성으로서의 일부 특이 요소를 일컬어야 한다.

 

이 중 '오징어회는 그냥 오징어일 뿐'이라고 말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첫번째, 두번째 문장의 동시 충족일테고, 충분조건은 세번째 문장이 될 테다. 즉 오징어회의 회과 오징어性에 대한 해당 표현은 조건부로만 성립함을 확인하며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주) 

*이는  고교의 학급 분류법을 차용한 것이다.

**첫번째와 두번째 경우에는 '삶은오징어'로 붙여씀이 '삶은 오징어'라고 띄어쓰는 것보다 적절할지 모른다. 일반적인 관형어구로서의 의미는 와해되고 근본적인 존재에 개입하고 있다면 '수식언'이라는 틀로부터 아예 벗어난 것으로서, 그 사실이 외형적으로도 드러나야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이때 '동일한 단어'와 '동의어'는 구분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의미가 같고 외적인 형태소가 같지만 동일한 단어가 아닐 수 있다. 형태소가 똑같다는 관점 역시 우리의 인식에 의했을 뿐이며, 인식은 무엇보다도 주관적이어서 그러한 의미 부여는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동일한 단어든 동의어든, 이어지는 모순 상황을 마주함은 마찬가지이다.


-소재 출처 : 2022.02.05, 동기들과의 카톡.

이때 '그럼 삶은 오징어는 오징어가 아닌가?'라고 카톡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참았었다

 

 

놀랍게도 알코올은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쓴 글... 취하지 않고서 취한 글을 쓰는 것, 무논리로서 논리를 설파하는 것이 본 게시판의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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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 사이트도 아니고 개인 티스토리 블로그인데 게시판 설명을 굳이굳이 하는 이유는..

이 게시판의 특수성 때문입니다.

정보 전달적인 보통의 티스토리 게시판과 달리...

 

여기에는 정말

소위 '뻘소리'들만

올릴 예정입니다.

ㅎㅎ

 

맥주 리뷰나 공부 이야기 등의 정상적인 이야기도 이곳에서 나눌 계획이 있지만..

게시판 하나만큼은 그냥 떠오르는 것들을 마구마구 올리는 곳으로 삼으려 합니다.

 

가끔씩 길을 걷다가, 혹은 왓챠로 영화를 보다가, 아니면 친구들과 카톡을 하다 보면,

무언가 곁가지로 생각들이 피어날 때가 있습니다.

 

웬만하면 주변인에게 바로 말하지만 가끔 그러기에도 너무 지나치게.. 헛소리같다고 느껴지는 내용들은

따로 핸드폰에 메모를 해두곤 합니다. 언젠가 써먹을지도 모르니까(?)

원래는 그러고 끝내려 했는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생각이 쌓이다 보면 이것을 풀어내고 싶고 공유하고 싶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만들었습니다 - 뻘소리 게시판..아니 생각글 게시판.

(원래 쌉소리 게시판.....이라고 제목을 달고 싶었으나,, '사람이 격이 있어야 해'라는 중학교 음악선생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서...바꿨습니다. 더 격있는 게시판명으로,,)

 


 

원래 제가 그린 그림이나 좋아하는 음악이랑도 연계해서 써보고 싶었고... 또 가끔씩 3D 객체를 이용한 설명이 필요한 뻘소리는(이쯤되면 대체 평소에 뭔 생각을 하고 사는건지가 의문이죠) 모델링 툴도 배워서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개강러+cpa재시러의 현생을 살면서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일단 소재는 메모장에 20개 조금 넘게 쌓여있으니, 격주로 한 편씩 올린다고 쳐도 1년 정도는 거뜬하군요! 와!

 


 

생각거리들을 철학적 사유와도 연결시켜서 철학공부도 좀 해볼까 했었는데, 그러면 정작 주인공인 '생각거리' 그 자체의 위상이 흐지부지해질 것 같아서 철학을 덧붙이는 방식은 기각되었습니다. 철학 같은 고유의 학문의 들고 오는 순간 제 뻘소리들은 그저 해당 철학 이론들의 용이한 이해를 위한 비유적 표현에 지나지 않게 될테니까요.

 

이곳은 정말 최대한 '쓸모 없는 생각들'만이 기거하는 장소로 삼고 싶기 때문에 오로지 뻘소리를 위한! 뻘소리에 의한! 게시판으로 만들 예정이네요. '글을 위한 글'은 원래라면 싫어하지만... 이 게시판은 애초에 목적 자체가 그런 글들을 위한... 일종의 보금자리가 되겠습니다.

 

그럼 제1 편,  <오징어회의 오징어성과 삶은 오징어>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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