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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 김홍도

 

하얀 옷자락이 펄럭인다. 수분을 머금은 모래 덩어리는 거세게 부딪히는 발아래에서 짓눌린다. 나는 눈을 감는다. 함성과 거친 숨소리를 귓가로부터 밀어낸다. 그리고 가만히, 가만히 침전한다. 저 모래 속으로, 눅눅하게 서걱거리는 차가움 속으로. 서로의 바지춤을 잡고 씨름하는 선수들 밑, 무겁도록 서늘한 대지 안에 어느새 나는 있다. 양쪽 귀가 먹먹해진다. 쭈그려 앉는다. 고개를 파묻는다. 점점 더 모래로 덮여가는 나를 꺼낼 수는 없다. 선수들의 발밑에서 다져지는 토양, 튀기는 모래알. 그 모든 것은 저어 위에서 숨쉬고 나는 여기에 존재한다. 다시 박차고 올라가기엔 축축해진 흙이 가슴을 눌러 숨을 쉴 수 없다. 언제까지나, 어쩌면 언제부터나

 

딱히 씨름을 구경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여기 앉아있었을 뿐인데 사람들이 오고 판이 벌어지고 늘 동네를 돌아다니는 엿장수 아이가 오고 씨름이 시작되었다. 시끌벅적하다. 북적이는 분위기 속에서 떠도는 존재는 홀로 가라앉는다. 씨름장으로부터 약간 뒤편에 앉아 희멀건 시야로 앞을 쳐다본다. 저 선수들. 벌개진 얼굴과 솟아난 힘줄에서는 열정의 색채가 진동하고 있다. 순간으로 충만한 그 색채를 나는 바라보는 것일까. 하지만 침전하는 시야에서는 현재의 박동조차도 뿌옇게 흐려져 울릴 뿐이다. 활기찬 분위기 속에 나는 있다. 그렇기에 더욱 활기찬 분위기 속에 나는 없다. 씨름하는 저 선수들처럼 공기의 성정을 뒤틀고 흔드는 힘을 발휘하고 싶은 것일까. 결국 차가운 모래에 파묻히리라는 걸 아는 자의 몸부림에 불과할 텐데.

 

씨름 후는 공허하다. 일부러 그 공허함을 마주하려던 것 역시 아니었다. 그저 처음과 똑같이 여기 앉아있었을 뿐인데 사람들도 엿장수 아이도 선수들도 그 열기도 함성도 색채도 박동도 모두 떠나갔다. 채워져 있던 존재만이 지워질 수 있기에 가득 차 있던 씨름의 시간은 더 큰 허무함으로 귀결됨이 분명했다. 모두 이렇게 허무함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삶인가. 나는 어쩌면 기쁘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러나 하강하는 기쁨이 침전하는 나를 끌어올려 줄 수 없음은 당연하다.

 

이곳에서는 또다시 씨름이 열리겠지. 그 열기와 작열하는 힘. 그리고 나는 그때에도 여기에 가만히 있을 테다. 모래의 찬 기운은 다시금 나를 둘러싼다. 그 습한 기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아니 그것조차 아닌가. 습기가 나를 잠식하도록 가만히 있을 뿐인가. 위에서는 함성이 들린다. 그 함성을 밀어내려 더욱 고개를 숙이고 먹먹한 토지 속에 나를 가라앉힌다. 언제까지고.

 

-씨름을 보며

 


문학글 게시판도 따로 만들까 하다가 말았습니다. 씨름도를 보고 흔히 느끼는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글을 적어보고 싶었던 결과물입니다. 나중에 작곡을 배우면 가사로 써먹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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