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일제 품종개량 사업의 결과
3.1. 우량품종 보급으로 인한 생산성의 변화
조선에서 쌀 생산량의 변화가 1910년대에 성장하다가 1920년대 정체하고, 1930년대에 재성장하는 것은 우량품종의 보급 상황으로 설명된다. 1910년대는 조신력에 의해 생산성이 향상되지만, 1920년대에 들어 곡량도가 수위품종이 되며 생산성이 정체된다. 그 후 1930년대에 다시 생산성이 늘어날 수 있었던 원인은 2세대 품종인 은방주의 보급과 연결되어있었다. 추가로, 남한보다 북한의 쌀 생산성 증대 속도가 더 빨랐던 원인은 우량품종 보급의 생산성 증대 효과가 북한 지역이 더 높았던 것이 통계적 분석이 존재한다. 이처럼 남북한의 생산성 증대 속도 비교를 통해서도 우량품종의 보급이 생산성의 변화와 직결되는 것을 알 수 있다.*22)
다만 앞서 1920년대에 곡량도의 보급이 생산성 정체를 가져왔듯이, 우량품종이 보급되는 것이 늘 긍정적 영향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시대별, 지역별로 품종에 따라 효과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1910년대에는 남한 지방의 조신력만이 우량종 보급이 생산성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고 북한 지역의 일출은 유의미한 생산성 증대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반대로 1920년대에는 북한 지방의 구미만이 증대를 가져온다. 즉 우량품종의 확산과 생산성 향상은 음의 관계를 이루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우량품종의 보급이 생산성 증대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경우에서도 구체적인 품종에 따라 그 효과의 크기는 다르게 나타난다. 1930년대에 남한에서는 은방주가, 북한에서는 육우132호가 생산성 향상에 공헌하지만, 그 효과는 육우132호가 2배 정도 높게 나타난다.*23)
정리하자면 우량품종의 보급은 분명히 생산성 증대에 있어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 사했지만 언제나 양의 관계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이는 1920년대의 정체기를 통해서, 그리고 1930년대 이후의 상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930년대에 은방주가 보급되기 전, 1930년대 초반의 장려품종이 쌀 생산성 증대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내지 못한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쌀 우량품종이 오히려 생산량을 절감하기도 했다는 것이다.*24)
이처럼 우량품종의 보급이 생산성에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준 것은 권업모범장의 식민지 본국 중심성에서 야기된 연구 소홀에서 일부 기인한다. 앞장에서 살펴봤듯이 권업모범장은 기본적으로 깊이 있는 연구 없이 일제 농업 기술을 그대로 조선에 도입함으로써 농사개량을 꾀하고 있었다. 앞서 본 조신력에서 곡량도로서의 주력 품종 교체에서도, 둘 사이의 내비성 차이를 충분히 연구하지 못하여 비료가 증대되는 시대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多肥 시대로 넘어옴에 따라, 농민들은 그나마 조신력보다 내비성이 나은 곡량도로 품종을 교체하며 대응하고자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내비성‧내병성을 갖춘 품종으로서의 은방주를 1922년에야 도입하지만, ‘다비 다수확 품종’으로서 장려된 것은 1930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은방주가 장려품종이 되자마자 재배면적이 급격히 늘고 곡량도는 급격히 면적이 줄게 된 것도 곡량도는 당시 농업 현실에 부적합한 품종이었음을 보여준다.*25)
다만 주의할 점은, 이러한 연구에서의 실책을 ‘의도적인 식민지 탄압'의 방향으로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곡량도의 교체로 생산성이 정체된 것은 일본의 의도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일본 농업기술자들이 조신력과 곡량도를 장려품종으로 선정할 당시는 少肥가 일반적이었으므로 내비성을 크게 고려하지 못한 것은 불가피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생산성의 정체라는 결과 자체보다는 그것을 야기한 원인으로서의 ‘일제 농업 기술의 이식되던 형태’의 문제에 주목하고자 한다.
3.2. 전반적인 농사개량에서의 식민 지배 상황의 영향
3.1 단락에서 우량품종의 생산성을 통해 ‘우량품종의 도입’이라는 구체적인 분야 에서 일제와 조선 간 식민지 관계가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봤다면, 아래의 내용은 식민 지배의 상태가 전반적인 농사개량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살펴볼 것이 다. 우량품종의 도입 역시 농사개량 사업의 하나였기에, 둘은 같은 맥락에 있을 수밖 에 없다. 식민지적 특성은 크게 사업의 목표 수립 측면, 그리고 연구 및 기술 도입의 측면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식민지 본국의 사회적 요구에 따라 농업 기술의 시험 연구가 이루어졌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정책의 추진 주체가 처한 사회적 상황이 정책에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 일로서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식민 지배라는 상황에서는 정책 추진 주체 는 일본이지만 추진의 대상은 한국이기에, 그러한 사회적 요구의 반영이 ‘구조적인 지배’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일제 농업기구에서는 일제가 한국 농업을 구조적으로 지배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들을 펼쳐나갔다. 특히 그러한 특징은 1910년대 후반에서 20년대 초의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1917년 여름부터 일본에서 쌀값이 급격히 오르지만 쌀 수확은 감소한다. 1차대전 특수로 인한 인플레이션, 도시노동자의 쌀 소비 증가, 쌀 상인들의 담합과 투기까지 벌어지며 1918년 7월에 쌀 폭동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또한, 이 시기 한국에서는 1919년에 경기도 지역 중심으로 가뭄이 심하여 농민의 구제가 시급해졌다. 이러한 식량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농산물 생산의 증대가 요청되었다. 덧붙여, 1차 세계대전의 총력전 형태를 보며 식량 자급의 중요성을 일본 정책담당자들이 인식했다는 측면도 있었다. 이러한 일제의 필요 하에 산미증식계획이 수립, 전개되어 한국에서의 농사개량은 일제의 농업발달과 식량의 증산에 궁극적으로 목표를 둔 것이다.*26)
둘째로, 일본 환경에 맞추어 식민지 본국에서 축적된 연구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조선의 기술을 경시하고 일본에서 기술을 수입해오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조선에 맞는 기술 개발이 아니라, 일본 농업 기술을 권업모범장에서 시험해본 결과 조선의 상황에도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것을 그대로 이식할 뿐이었다.*27) 이러한 식민지 본국 위주의 조선 농업 개편의 두 가지 특징은, 조선 농업구조의 米單作化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일본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한국의 쌀 증산’에만 초점을 맞추어, 농업기구 내 기술자들은 한국의 벼농사에 적용할 벼 품종, 재배 방법 등에 집중하여 벼농사에 편중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에 비해 밭농사의 발전은 부진했다. 밭농사는 집중적인 육종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고 식민지 초기와 후기를 비교했을 때 일정 면적당 생산량이 증가한 것은 5개 품종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밭작물은 생산량이 정체되거나 오히려 줄어들었다. 일본의 농업기술자들은 주로 벼농사에 전문이었으므로, 조선 밭농사를 잘 알지 못했으며 재래 농법에 대한 무지는 그에 대한 경시로 이어져 벼농사 부분의 지도가 제대 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28) 더불어 건조한 땅에서의 농업 경험이 부족했던 일본 기술자들의 밭농사 기술 개발 능력의 부진이 그대로 조선에까지 이어진 것도 밭작물 생산량 증대 부진의 요인이다.*29)
1910년대 후반 여러 쌀 폭동 등의 식량문제로 인해 식량 위기 극복이 요구될 시기에는 권업모범장 서산지장을 설치하며 밭작물에 관한 관심을 전개해 나가는 식으로 태도가 변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산미증식계획의 실행으로 쌀 생산을 중심으로 하게 되어, 실제 농업 현장에서 식량용 밭작물 장려 정책은 뒤로 밀려났다. 또 일본에서 식량문제가 해결되어 가며, 굳이 밭작물의 증산까지 시행할 필요가 없게 되기도 했다.*30)
이처럼 미단작화의 경향은 식민지 본국인 일본의 목적과 요구에 좌우되며, 일본의 연구 상황을 그대로 이식할 뿐이었던 당시 농사개량 사업을 잘 보여준다.
주)
22) 우대형, 위의 글, 83면.
23) 우대형, 위의 글, 76-79면.
24) 김도형, 「일제강점 하 농업기술기구의 식민지 농업지배적 성격」, 농업사연구4-1, 한국농업사학회, 2005, 7면.
25) 우대형, 위의 글 79-80면
26) 김도형(2005), 위의 글, 11-12면.
27) 소순열, 「식민지기 전북에서의 수도품종 (水稻品種)의 시험연구와 그 보급-식민지농업기술의 주체성 해명을 위하여」, 全羅文化論叢5,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국소, 1992, 11-12면.
28) 류정선, 위의 글, 10면
29) 소순열, 「식민지기 전북에서의 수도품종의 변천」, 농업생명과학연구23, 전북대학교 농업과학기술연구소, 1992, 11면.
30) 류정선, 위의 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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