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여소의 의복은 고증에 철저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과거’의 양장 스타일인 것은 맞지만 그 시대가 개화기가 아닌 일제강점기의 의복이라는 문제가 가장 빈번히 발생했다.
옷 길이의 측면에서, 개화기에는 바닥에 끌리는 길이의 치마를 입었으며 발등 위로 올라온 것은 1918년 이후 즈음부터이지만 대여소의 치마는 원피스와 스커트 모두 발목이 드러난다는 차이가 있었다.
전반적인 스타일의 측면에서 대여소에는 1910년대 이후에 유행한 하이네크라인의 옷이나 1920년대에 유행한 U자형 네크라인도 많이 보였다. 개화기 당시에는 스탠드 칼라 형태의 깃이 지배적인 옷 스타일이었기에, 대여소의 옷의 목선은 시대에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 또한, 퍼프 소매가 유행했던 개화기의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버슬 스타일 같은 인위적인 라인이 아닌 s자 실루엣의 옷이 대여되고 있다는 점은 고증에 맞다.
장식 사용의 측면에서는 그 종류에 따라 고증이 맞는 정도가 달랐지만, 대체적으로는 일제강점기에 유행한 장신구를 준비해놓은 경우가 많았다. 모자는 챙이 넓은 종류를 제대로 갖추기도 하였지만 다른 시기에 유행한 모자도 함께 있다는 문제가 있었고, 양산과 우산의 경우 개화기보다는 일제강점기에 더 많이 이용되었음에도 대여해주고 있었다. 장갑 역시 1920년대 이후부터 유행하였는데 대여소에 준비되어 있었다.
이러한 고증의 부정확함이 나타난 이유를 여럿 생각해볼 수 있겠다. 먼저 ‘개화기’라는 명칭 자체가 잘못 인식되곤 한다는 점이 있다. 비록 주류 이론은 개화기를 1876~1910년으로 정의하고 있지만, 일부 학자의 경우 일제강점기까지 개화기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혹은 개화기를 ‘개화가 일어난 시기 전반’ 정도로 불명확하게 생각하여 일제강점기까지 포함해버리기도 한다. 둘째로, 실제 개화기 여성 의복을 그대로 고증할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당시 가장 유행했던 s자 실루엣을 위해서는 코르셋이 필요한데 이는 불편할 뿐만 아니라 요즈음의 페미니즘 담론과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리 고증에 맞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어 상업 활동을 해야 하는 대여업자로서는 해당 의복을 들여오는 것을 꺼릴 것이다. 코르셋 외에도, 퍼프 소매나 긴 기장의 치마보다는 딱 맞는 소매와 조금 짧은 치마가 활동하기 편하므로 고증에 맞지 않는 옷이 나타났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의 의복을 개화기 의복이라고 대여하는 경우가 많은 상황이기에, 개화기 의복 대여소들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물론 의복을 대여하는 사람들은 ‘고증에 정확히 맞는 옷을 입으려는 목적’이라기보다는 그저 당시의 분위기를 즐기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따라서 고증의 정확도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개화기라는 시대는 일제강점기와 바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가벼이 다룰 수 없다. 대여소들은 고궁이나 종묘 근처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기에, 일제강점기 의복을 입고 그 시대의 분위기를 즐기며 역사 유적지를 돌아다니는 상황을 초래할지 모른다. 그런 상황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개화기 의복 대여소의 잘못된 고증을 개선할 필요성이 있다.
참고문헌
논문
김영희, 「개화기 양복도입과 수용과정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7.
나윤영, 「한국 여성의 헤어스타일 변천에 관한 연구 : 1900년대부터 1990년대를 중심으로」, 호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1.
이정원, 「아르누보 이미지의 드레스 디자인 연구 : 장식 디테일 사례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유수경, 「韓國 女性洋裝의 變遷에 관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9.
유정이, 「한국과 일본의 신여성복식 비교 연구 : 20세기 전반부를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실제 1900년대와 그 이전의 치마 길이는 바닥에 끌리는 정도였으며, 1918년 이후 정도에야 치마 길이가 짧아져 발등 정도에 이르렀다.*4) 그때에 이르러서도 발목이 보이는 길이는 아니었으며, 이후 더 치마가 짧아지기 시작하여 1928년에는 무릎까지로 짧아졌다.*5)
이와 비교해서, 롯데월드 대여소의 치마 길이는 발목이 드러나는 정도가 대부분이며 익선동 대여소도 치마 길이는 발목을 겨우 덮거나 발목이 드러나는 정도이다. 이러한 치마 길이는 개화기 이후에 나타난 형태이므로 적합하지 않다. 발목이 드러나는 것은 일제강점기 중반 이후부터의 치마의 모습이다. 또한, 각 대여소에서 몇몇 치마는 무릎 정도의 길이에 오는 것도 있는데, 이는 1920년대 후반에서야 나타난 길이므로 개화기 의복이라 말하기 어렵다.
2) 전반적인 유행 스타일의 차이
1900년대 이전의 의복은 양장이 아직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처음으로 양장을 하였던 윤고려, 엄비, 박에스더 등의 여성 양장의 특징은 s자 실루엣이 주를 이루고*6), 깁슨걸 스타일, 지고 드레스, 버슬스타일, 도렌 드레스 등의 롱플레어 스커트가 많다. 레이스 장식의 하이 네크라인과 함께 가슴은 레이스로 장식하고, 머리에는 레이스로 화려하게 장식한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다. 양장이 아직 상류층 중심으로 퍼진 시대였으므로, 단정하고 평범한 종류보다는 화려함을 부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1890년대 양장의 형태는 위에서 설명한 초기 양장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애초에 양장을 한 이들이 별로 없었기에, 양장을 들여온 여성들의 스타일이 당대의 스타일로 정착된 셈이다. 우선 대표적인 형태로는 깁슨걸 스타일이 있는데, 어깨를 강조한 큰 소매에 스커트는 길이가 길고 폭이 넓게 퍼져 있었으며 목에는 리본을 맸다. 이후 몸의 전체적인 곡선을 모래시계와 유사하게 보이게 하는 아워글래스 실루엣 드레스, 지고 슬리브라는 소매가 특징인 지고 드레스, 보충재를 옷에 넣어 골반 등의 신체 일부를 강조하여 드러내는 버슬 스타일, 긴 주름치마가 나타나는 롱플레어 스타일 등이 나타난다. *7)
차례대로 <그림1>, <그림2>. 직접 그린 그림들인데 왜이렇게 화질이... 안 좋지...
이후 신여성이 입은 양장은, 1900~1945년 미국에서 유행한 스타일과 비슷하게 유행하였다. 1900년대의 의복은 미국의 아르누보 스타일에서 영향을 받은 s자 실루엣이었다. 아르누보 스타일이란 그전까지 옷을 과장되게 부풀게 하여 신체를 강조했던 버슬 스타일과 달리, 몸의 곡선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형태이다.*8)
<그림 1>의 왼쪽은 s자 실루엣 원피스를, 오른쪽은 버슬 스타일 원피스를 나타낸다. s자 실루엣은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이고 가슴과 골반을 강조하며, 몸의 곡선을 드러내며 옆에서 보았을 때 s자를 이루도록 하는 형태이다. 소매는 주름 잡힌 퍼프 소매 형태로 어깨를 조금 강조하는 형태가 많았으며 외투는 테일러드 재킷 형태였다. 테일러드 재킷이란 남성의 정장과 유사한 형태로 제작된 재킷을 뜻한다. 박에스더도 블라우스를 입고 그 위에 재킷을 입었으며, 재킷은 퍼프 소매 형식이었다. <그림 2>는 퍼프 소매 원피스의 예시이다.
개화기 이후인 1910년대의 의복도 비교를 위해 살펴보자면, s자 실루엣의 변형으로, 허리선이 조금 올라간 자연스러운 형태였다. 스커트와 원피스는 A라인을 이루었다.*9) 지고 슬리브 드레스라는, 퍼프 소매에서 주름잡는 방식이 조금 달라진 소매를 갖춘 드레스를 입기도 했다. 이는 보다 과장되지 않은 어깨선을 드러내었다. 또한, 깁슨걸 스타일의 드레스도 다시금 유행하였다.
익선동 대여소에 배치된 의복의 경우 1910년대에 주로 유행한 양식이다. 의복의 목선은 U자 네크라인이기도 하고, 깃이 있거나, 목을 덮는 형태의 하이 네크라인 블라우스이다. 한국에서 깃이 있는 목선은 양장 도입 초기에, 하이 네크라인은 1910년대에, 라운드 네크라인은 1920년대에 유행한 것이다. 1909년의 사진을 보면 하이 네크라인의 원피스에 모자를 쓰기도 했지만, 이는 당시 유행을 앞서나가는 스타일로 묘사된다.*10)
따라서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기 직전이라면 하이 네크라인이 존재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형식이 주가 되지는 않았기에 대여소의 의복 목선 대부분이 하이 네크라인의 형태인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롯데월드 대여소의 의복은 목선은 깃이 있거나 하이 네크라인 형태이다. 깃이 있는 형태의 블라우스 혹은 원피스는 양장 도입 초기에 유행했기에 적정하지만, 하이 네크라인의 경우 익선동 대여소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개화기 때의 의복 모양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그림 3>은 왼쪽부터 하이네크라인, 라운드 네크라인, 깃이 있는 네크라인을 보여준다.
<그림3>
또한, 두 대여소 모두 소매의 형태가 퍼프 소매가 아닌 일반적인, 팔에 밀착되는 형태의 의복이 많았다. 개화기 당시에는 퍼프 소매가 유행했기에 이는 적합하지 않다. 과장되지 않은 소매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1910년대 이후이다. 개화기에 여성 양장 외투로 많이 착용하였던 테일러드 재킷도 대여소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남성 정장의 일부로서 갖추고 있을 뿐, 개화기 여성 의복으로서 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옷의 라인은, 버슬 스타일처럼 옷을 일부러 부풀리는 형태가 아닌 자연스러운 몸의 곡선을 드러내는 원피스나 스커트가 많았기에 고증에 맞았다.
두 대여소 모두 스커트와 블라우스의 분리된 의복 형태보다는 원피스를 대여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은 양장 도입 초기에는 원피스 드레스 형태를 입다가 이후 블라우스와 스커트로 따로 구성된 형식이 많아졌다. 이는 저고리와 치마의 한복 형태가 반영된 것이다. 반면 일본은 전통 복식인 기모노가 원피스 형태이기에, 양장도 원피스 스타일이 많았다. 개화기는 양장 도입 첫 10년 정도이므로 초기에 원피스 드레스가 만연하던 시기에 속한다. 다만 이러한 구분은 명확한 것은 아니며 원피스와 블라우스‧스커트 형식은 함께 나타났다. 따라서 대여소의 의복이 원피스 형식인지 아닌지의 여부만으로 1900년대 당시 한국에서 유행하던 양식인지 일본에서 유행하던 양식인지 구분하여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3) 장식의 차이
장식은 모자, 양산/우산, 장갑, 그리고 신발과 머리 모양을 살펴볼 것이다. 양장을 한 여성은 모자를 착용한 경우가 많았다. 189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 가장 초기의 양장 여성들의 경우 박에스더는 챙이 좁은 모자를 썼고 윤고려나 엄비는 챙이 넒은 모자인 ‘카풀린’을 썼다. 가장 먼저 양장 교복을 도입한 숙명여고는 챙이 없는 ‘보닛 모자’를 썼다. 그 시기부터 1910년 이전에는 챙이 넓은 모자를 착용하거나, 모자의 높이가 낮고 챙이 넓은 모자에 리본이나 깃털 등을 장식된 모자를 착용했다. 챙이 좁고 아래로 향한 형태의 ‘클로쉐’가 챙이 넓은 카풀린보다 유행하게 된 것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였다.*11) <그림3>은 1900년대 한국 여성 모자의 대표적 형태로, 넓은 챙을 확인할 수 있다.*12)
익선동 대여소는 작고 둥글며 망사 형태의 베일이 얼굴을 일부 덮는 형태인, 머리에 고정시키는 방식으로 착용하는 모자를 주로 배치해두었다. 이는 사람들이 흔히 ‘개화기 모자’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형태이며, 실제로 인터넷 검색 플랫폼에 ‘개화기 모자’라고 검색할 경우 이러한 형태의 모자 이미지가 대다수이다. 그러나 작은 망사가 드리워진 둥근 모자가 개화기에 한국에서 유행했다는 자료는 특별히 찾아보기 어렵다. 롯데월드 대여소는 익선동 대여소보다 다양한 형태의 모자를 배치해두었다. 우선 챙이 넓은 형태의 모자가 많았으며, 클로쉐, 그리고 익선동 대여소와 마찬가지로 베일이 달린 모자 등이 준비되어 있다. 챙이 넓은 모자는 개화기에 실제로 많이 착용된 모자 형태라고 할 수 있겠으나, 클로쉐의 경우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유행한 것이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림 4>의 왼쪽은 클로쉐, 오른쪽은 카풀린의 예시이다.
<그림 4>
양산과 우산은 쓰개치마를 쓰지 않게 되며 내외를 위한 목적으로 한복 착용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쓰개치마가 짧아졌다는 기록은 1897년에 나타나며 1900년대부터 처음 벗기 시작하지만 본격적으로 사라진 것은 개화기 이후 일제강점기에 본격화된 현상이다.*13) 더하여, 여학생들이 쓰개치마를 쓰지 못하게 한 시기는 각 학교마다 달라서, 이화학당의 경우 1910년경에도 착용했다. 따라서 양산의 사용을 1900년대의 개화기 의상이라고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초기에는 한복 착용자들이 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더욱 개화기 양장 대여소와 맞지 않다.
실크와 면으로 된 서양식 장갑이 유행한 것은 1920년대부터인데*14), 익선동과 롯데월드 대여소 모두 실크 혹은 레이스 재질의 장갑을 대여해주고 있다.
신발이나 머리 모양의 경우 대여소에서 준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대여 서비스를 이용하는 개인이 가져오는 것이므로, 고증의 정확도 여부를 따지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고증에 어긋난다고 해도, 이는 대여소 측의 실책이라기보다는 의복 대여 서비스의 현실적인 한계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다만, 한복 대여점의 경우 댕기를 대여해주는 등 머리 모양도 의복에 맞출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개화기 의복 대여소에서 그런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운 면이 있다. 또한 한복의 치마 길이는 바닥에 끌리는 경우가 많아 신발이 대부분 보이지 않는 반면 개화기 의복 대여소에서는 발목이 드러나는 길이의 치마를 대여해주므로 신발이 선명하게 보인다. 따라서 개화기 의복 대여소에서 신발만큼은 구비하고 있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개화기 의복에 적합했을 신발과 머리 모양은 다음과 같다. 1910년대 이전 신발은 굽이 낮은 이브닝 슈즈, 오페라 펌프스, 후디드힐, 스태크 힐 등이었는데 이들의 특징은 굽의 높이가 낮았으며 문양이나 장식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양말과 더 다양한 종류의 구두가 들어온 것은 양장의 길이가 짧아진 1910년대에 이르러서였다.*15)
따라서 대여소에서 구비하면 좋을 신발은 단정한 형태의 굽이 낮은 구두일 것이다. 1900년대 머리 모양의 경우 기존의 쪽진머리 양식, 즉 머리 중앙의 가르마를 중심으로 잔머리 없이 빗었던 것에서 발전하여 가르마의 위치를 좌우로 이동하고 부피감을 주어 묶었다. 또한 이화학당 학생 사이에 잠시 유행한 ‘팜프도어’, 혹은 ‘히사시가미’라고도 부르는 스타일도 있었는데, 이는 머리를 치켜 올려 빗어 리본을 매거나, 이마 위에 모자의 챙 같이 빗어 올린 머리 형태를 의미한다.*16) 대여소를 이용하는 여성들은 긴 머리를 푼 채로 모자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머리를 틀어올리는 것이 더 개화기에 적합한 머리 형태일 것이다.
(다음 글에 이어서)
주)
4)유수경, op. cit., p.147.
5)유수경, 韓國女性洋裝變遷史, 일지사, 1991, p.176.
6)유수경, 「韓國 女性洋裝의 變遷에 관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대학 박사학위 논문, 1989, p.129.
7)김영희, op. cit., p.90.
8)이정원, 「아르누보 이미지의 드레스 디자인 연구 : 장식 디테일 사례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8, p.31.
9)유정이, 「한국과 일본의 신여성복식 비교 연구 : 20세기 전반부를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7, pp.30-31.
10)유수경, 「韓國 女性洋裝의 變遷에 관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89, p.134.
11)유정이, op.cit., p.97.
12)유정이, op.cit., p.100.
13)김영희, op.cit., p.94.
14)유정이, op.cit., p.99.
15)유수경, 韓國女性洋裝變遷史, 일지사, 1991, p.146.
16)나윤영, 「한국 여성의 헤어스타일 변천에 관한 연구 : 1900년대부터 1990년대를 중심으로」, 호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p.36.
한복 대여 서비스가 성행하는 것에 이어, 개화기의 복식을 대여하는 업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궁 근처, 혹은 테마 파크 내부에도 이러한 업체들이 생겨났으며 sns를 통해 자신의 가게를 홍보하는 모습도 보인다. 개화기의 조선은 서양식 문화가 유입되며 양복의 유행이 나타났었다. 그렇기에 실제로 19세기 무렵의 조선에는 한복과 양복이 혼재된 사회 모습이 나타나지만, 대여소의 개화기 복식들은 대부분 양복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여성 의복이 주를 이룬다. 대여소의 의복들이 과연 실제 개화기의 의복 상황을 반영하여 제작된 것인지, 혹은 업체 운영자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개화기에 입었을 법한’ 현대 의복을 비치해 둔 것인지, 의복 대여자는 쉽게 알기 어렵다. 의복 대여소들의 명칭도 ‘경성 의복’등, 일제강점기에 사용된 명칭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역사적 인식의 부재가 드러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개화기의 조선 의복을 다룬 연구 논문을 참조하며 개화기 복식 대여소의 의복들이 실제로 개화기에 입었던 의복의 형태를 띠고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업체가 다수 생겨나고 있으며 sns로도 홍보를 하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대여소의 복식을 접하고 있다. 따라서 개화기 복식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전달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탐구가 필요하다.
우선 개화기라는 단어가 나타내는 시기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해당 시기의 여성 양장 도입에 대한 간략한 역사적 배경 설명을 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개화기 복식 대여소 중 이 연구에서 살펴볼 곳을 특정해야 한다. 직접 가서 옷을 비교하는 것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으므로, 해당 업체의 홈페이지나 업체 운영자의 sns 홍보 사진을 통해 비교하고자 한다. 또한, 다양성의 확보를 위해 고궁 주변의 복식 대여소 한 곳인 ‘익선동 경성의복(이하 ‘익선동 대여소’)’과 테마파크 내의 복식 대여소 한 곳인 ‘롯데월드 픽시 매직 살롱(이하 ‘롯데월드 대여소’)’, 총 두 곳을 선정하여 논문 내 개화기 복식과 비교하고자 한다. 복식 대여소 중 홈페이지 혹은 sns 활동이 활발한 곳을 선정하는 것이 연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요구되므로, sns 게시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대여소의 의복이 가장 많은 두 지점을 선정하였다.
더 자세한 연구를 위하여 의복을 상하의와 원피스 등의 주요 의복과 함께, 신발, 모자, 기타 장신구 등 세부적인 부분까지 비교할 것이다. 이때 기타 장신구는 신발, 장갑, 브로치, 귀걸이 등 다양한 잡화와 악세서리를 포괄한다. 그러한 분류를 통해서 두드러지는 차이점을 소단원으로 정리하여 나타낼 것이다.
참고하는 논문은 주로 조선의 개화기 복식, 양장의 도입 등을 다룬 연구이다. 유정이의 「한국과 일본의 신여성복식 비교 연구 : 20세기 전반부를 중심으로」(2007)와, 유수경의 「韓國 女性洋裝의 變遷에 관한 硏究」(1989)를 주로 참고하였다. 그 외에 필요할 경우 서양 복식의 양식을 다룬 논문을 참고하였다.
1. 개화기 여성 양장의 시작
개화기의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논문 대부분에서는 강화도 조약에서부터 경술국치 전까지의 시기인 1876년~1910년으로 정의하고 있는 편이다.
1894년의 갑오개혁과 1895년의 을미개혁 이후 상류층의 남녀가 양복을 입기 시작하면서 그 수가 증가하였는데*1), 여성의 경우 1899년에 윤치호의 부인 윤고려가 양장을 한 것을 여성 양장 차림의 시작으로 본다.*2) 1895년 단발령 이후에 엄비가 양장을 한 사진도 있으나 그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기에 윤고려를 그 시초로 삼는 것이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00년에 귀국했던 박에스더도 양장 차림이었다.*3) 그들 외에도 당시 외교관의 부인들이 양장을 하고 파티에 참석하곤 했다.
즉 여성들의 양복 착용은 상류층이 1890년대 후반 이후에 양장을 해외에서 들여온 이후 차츰 일반인들에게 확대되며 나타났다. 따라서 비록 개화기는 1876년을 그 시작으로 삼지만, 개화기의 여성 양장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는 1900년 이후부터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다음 글에 이어서)
주)
1)유수경, 「韓國 女性洋裝의 變遷에 관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89, p.127.
2)김영희, 「개화기 양복도입과 수용과정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7, p.89.
조선 후기 사회 과거제의 문란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 직접 놓인 사대부의 내면 감정 및 문제 해결 의지는 잘 알 수 없었는데, <흠영>을 통해 과거제의 문란을 직접 목격한 사대부의 비판과 개선 논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주변인의 평가와 사회 분위기에 얽매여 남들을 따라 과거에 거듭 응시하는 현실 순응적인 모습도 드러난다. 틀린 제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맞추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당대 사대부들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경제사의 측면에서도 당시 빈부격차가 심했고 도고가 성장했으며 몰락 양반이 많았다는 기존의 상식에 덧붙여 그에 대한 사대부의 원인 분석을 볼 수 있었다. 유만주는 사대부의 모순적 태도를 사회 전체적으로 가난이 팽배하고 빈부격차가 심했던 원인으로도 꼽으며, 더불어 ‘도고’와 ‘사치’로 인한 분배의 불균형이 문제라고 말한다. 이처럼 당시의 경제 악화에 대한 사대부의 분석이 어떠했는지를 미시사적 탐구를 통해 확인 가능했다.
또한, 생활사의 측면에서는 단순한 사실 진술로는 알 수 없는 당대 사람들의 구체적인 내면이 드러난다. 문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경전 외의 책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평가를 했는지는 일기인 <흠영>이기에 알 수 있는 요소이다. 또, 가정 내부에 성리학의 영향이 강해진 가부장제만이 강조되던 기존과 달리, 아버지와 자식 간의 유대 관계와 가족 구성원 간 상호작용도 드러났다. 조선의 의학을 알아볼 때도 출간된 의학 서적의 종류나 의원의 숫자 같은 객관적인 지식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해당 서적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양상이나 의원의 진료 형태를 파악할 수 있다. <흠영>이 개인의 기록이기에 가능한 특징들이다.
다만 유만주의 생각들은 그의 개인적인 불행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비관적 성격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어 일반화가 조심스럽다는 한계가 있다. 이는 모든 미시사 연구의 어려움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흠영>의 탐구가 가치 있는 이유는, 유만주가 가졌던 독특한 생각들 또한 조선 사회와 그 속에서의 생애가 반영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제도 자체가 수많은 사람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고 있었고, 유만주는 그러한 인물 중 하나로서 그만의 현실 비판을 <흠영>에 적어 내려갔다. 또, 유만주의 특수한 의견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는 점 자체가 소수 의견까지 배제하지 않는 미시사의 장점을 보여준다.
이처럼 유만주의 <흠영>을 통해서 사회 변동이 당시 양반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내부자의 입장으로 세세히 파악할 수 있었으며, 거시사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생각도 알 수 있었다. 유만주의 삶은 사회적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조선 사대부의 관점에서는 가치가 없다고 평가받을 삶일지 모르지만, 그가 남긴 기록은 후대 사람인 우리에게 큰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미시사적 탐구를 사용했기에 평범한 한 개인이 역사 연구에서 비로소 중요성을 발현한 것이다.
과거제가 조선 후기에 문란해졌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한양에 살던 선비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미시사적 탐구방법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유만주는 과거제의 가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이는 매번 과거에서 떨어지던 본인의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며, 그가 목격한 과거 시험장의 폐단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과거제의 폐해를 잘 알면서도 동시에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는 당대 사대부들의 현실이 드러난다.
먼저 그는 과거제만을 중대한 일로 여기고 합격하는 자만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세태를 비판하고(1권 120면), 과거제의 합격을 인생의 성취라고 부르는 것에 회의감을 느낀다(1권 106-7면). 그러나 이렇듯 비판을 하면서도 그 역시 스스로가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생각들에 얽매여있었다. 이처럼, 미시사의 장점은 단순하게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내면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면의식을 통해, 사대부 계층의 비판적인 견해가 있었음에도 과거제가 이후로도 한동안 이어진 원인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지식인 계층이 ‘통치계급’으로서 존재의 의의를 지니던 상황에서, 유만주는 당시 과거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직한 선비라는 잉여 지위에 놓인 자신의 처지로 소외감을 겪었다.*2)그는 ‘열 가지가 없는 허랑한 자’로 자신을 칭하고 ‘부유(腐儒)의 무덤’이라는 암울한 말로 삶을 표현하기까지 한다.*3)과거를 고칠 정치적 힘도 없는 무력한 상황이고, 현실 개혁의 필요에 대한 인식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복잡한 심리 상태는 미시사적 탐구를 했기에 알 수 있는 요인들이다. 역사적 상황에 관해 거시사적 탐구가 알려주는 지식을 넘어서, 당시 사회를 내부인의 관점을 빌려 겪어보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또 거시사적 탐구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당시의 혼란했던 과거제 운영의 구체적 모습도 그의 일기로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과거를 치러 상경하는 어려움을 전하고, 답지를 빨리 내는 것만이 중요해져서 시험장에 먼저 들어가려는 몸싸움이 벌어지던 현장을 묘사하며, 이를 지켜보는 하층계급의 비웃음에 저자도 동조하고 있다. 과거 시험의 금지 조항들이 유명무실해진 상황도 제시된다. 응시생을 따라온 종자들도 많았고, 책 구절을 베껴 써오는 부정행위도 이루어졌으며, 공부할 때 편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시험관들은 진정으로 우수한 답안지를 가려내고 있지 않아 ‘과거제가 더욱 종잡을 수 없게 되었’(1권 123면)다고도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도 드러난다. 세상에는 수만 가지 재능이 있는데 과거 시험은 한가지일 뿐이므로 제도적으로 개선될 필요가 있다며, 반복해서 낙방한 자는 합격 처리해주는 송나라의 ‘주명 제도’를 추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주변의 평가를 신경 쓰며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그만두지 못한다. ‘시험장에 나아갔다가 남들을 따라 물러나’는(1권 124면) 것만을 반복하는 그는, 과거 시험은 어떠한 계책도 되지 못한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처럼<흠영>은 늘 과거 시험에 낙방하는 한양 거자가 느끼던 비판의식과 이에 섞인 현실 순응이 구체적인 언어로 드러나기에 미시사적 탐구에 걸맞은 사료라 할 수 있다. 이는 선비 하나의 태도임과 동시에 그가 살고 있던 현실이 만들어낸 모습이기도 할 테다. <흠영>을 읽으면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데, 만약 구체적인 내면의식에 대한 표현을 읽어나가지 않고 거시사적으로만 탐구한다면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 경제 문제에 대한 인식
유만주가 살던 조선 후기는 가난이 팽배하여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이러한 부의 편중이 다른 사회 폐단으로도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거시사적 탐구를 통해 그러한 시대 상황을 알 수 있다면, 양반들도 가난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양반 본인은 어떻게 여겼는지를 유만주의 일기를 보며 알 수 있다. ‘빈궁한 선비는 생계를 이어갈 도리가 없’다는(2권 39면) 말에서는 양반의 경제적 몰락에 대한 비관적 현실 인식이 드러난다. 양반 중 궁핍한 자는 오히려 신분이 낮은 자보다 하찮아지며, 가난이란 사형선고라는 생각까지 한다. 이러한 생각은 그가 쓴 고종사촌 형의 제문에도 담겨있다(2권 106면). 이처럼 미시사적 탐구를 통해, 경제적으로 몰락하던 계층 내부에서 당대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또, 당시 세태에 대한 나름의 분석이 이루어지는 양상도 유만주의 사례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우선 그는 양반들의 경제적 몰락을 조선의 직분 세습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연결짓는다. 선비가 상공업을 하찮게 여기며 차라리 굶는 것을 택하는 풍습이 편협하다는 그의 생각은 꽤 개혁적이다. 그는 재화의 절대적인 ‘양의 부족’이 아닌 ‘분배’의 문제에 주목한다. 도고의 독과점을 통한 재산 축적과 부자들의 사치로 나머지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진다는 인식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신분제에 따른 직업 가치관도 국가적 가난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양반은 부자든 몹시 가난하든 생산에 참여하지 않고, 생산을 맡은 하층계급은 생산할 수단이 부족해서 생계를 이어나가지 못하며 양측 모두에게 문제가 되고, 이는 국가의 가난으로도 이어진다고 구체적인 판단을 내린다.*4)이처럼, 당시 사회에 대해 양반 계층이 그저 틀에 갇힌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신념과 고민을 지녔다는 사실을 미시사적 탐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직업의 상하관계를 비판하면서도, 유만주의 시선은 사대부의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상민‧천민들이 양반을 칭하는 것을 기강이 무너졌다고 표현하고 이를 바로잡지 않는 관료들을 한심하게 여긴다.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을 이야기하면서도 양반으로서 하층민의 성장에 반발하고 위기의식을 느끼는 모습이 이중적이다. 경제적 현실을 인식하고 심각성을 느끼지만, 사회적인 신분의 우월성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대부 계층의 가치관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 역시 일기인 <흠영> 탐구의 특성이다.
2. 한양에 사는 거자의 생활상
가. 독서의 향유 양상
유만주는 열성적인 독서가였다. 따라서 흠영의 미시사적 탐구를 통해 독서의 다양한 양상을 알아볼 수 있지만 동시에 유만주만의 특성이 짙게 묻어나 있어 일반화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하더라도 한계를 인식한 상태에서 당시 한양의 거자가 어떤 의견을 가질 수 있었는지 확인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본다. 소수 의견의 확인 역시 미시사적 탐구이기에 가능한 것일 테다.
우선 <흠영>을 통해 당시 만연했던 의고적 문학관에 비판적인 입장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당대의 일반적인 의견은 금문을 고문보다 낮게 평가하는 의고적 문학관이었지만, 유만주에게 고인의 옛글을 본받는 진정한 방법은 ‘고인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지, 글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었다.*5)더불어, 의고적인 풍습을 깨고 새로움을 추구한 중국의 문인 전겸익을 칭찬하는 그의 모습은 당대 유명 문인들이 사대부들 사이에서 어떤 기풍으로 인식되고 있었는지, 또 그들에 대한 사대부들의 평가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끔 한다.
또한 <흠영>에서는 다른 기록들과 달리 소설에 대한 긍정적 의견이 다수 존재한다. 소설이 무척 인기였던 상황 속에서, 당대 문인들은 풍기를 문란하게 만들고 작문에도 악영향을 끼친다며 소설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와 달리, 유만주는 소설이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고 이해하기 쉬워 사람들의 성정을 깨우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며 옹호했다.*6)거시사적인 탐구로 소설의 유행 양상과 몇몇 유명 소설의 제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 미시사적으로 보면 해당 소설들에 대한 양반의 평가를, 유만주와 같은 특수한 의견까지도 구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또 숭유억불의 시대로 알려진 조선 사회에서 양반들이 불경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도 <흠영>에서 드러난다. 유만주는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했는데, 그중에는 불경도 있었다. 그는 불설은 사람은 속이는 것이며, 인과응보를 강조하여 혹세무민한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그의 불경 읽기는 사상적 체험의 일환이 아닌 편찬과 논평의 지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졌다.*7)그러나 이후에는 연이은 과거 낙방과 아들의 죽음 등의 불운을 겪으며 불교를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8)당시 불교가 정책상 탄압받았다는 것은 널리 퍼진 상식이지만, <흠영>의 사례는 사대부들이 단순히 마음을 다스리는 방책으로는 불교를 수용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종교와 같이 내면과 밀접히 얽힌 분야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살펴보려면 미시사적 탐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나. 가정에 대한 애착
<흠영>에 대한 미시사적 탐구를 통해, 기존의 서술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던 조선 시대 부자간의 유대 관계를 알 수 있다. 유만주가 <흠영>을 훗날 아들이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쓴 만큼, 글에서도 아들에 대한 사랑이 묻어나는 부분이 다수 존재한다. 아들 ‘구환’(이후 ‘교환’으로 개명)이 홍역, 천연두 등 병환에 걸릴 때마다 간호하는 모습이 드러나고,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는 것은 생활환경과 양육 방식에 달려 있다며 그저 꾸짖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교환이 요절한 후에는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펼치지 못하고 구속된 채 조심스럽게 살아 병이 났다며 자신을 탓한다. 일기가 아이를 떠올리게 해서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아이와 연결된 느낌이기에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들의 무덤에 갈 때의 상념은 비통함을 그대로 보여주며, 아들이 죽은 후에도 예전과 다름없는 자신의 모습을 모질다 평하는 장면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상황 속 감정을 가감 없이 묘사한다는 점에서 ‘일기’의 특성이 드러난다.
조선 시대의 가정생활은 가부장제의 확립, 여성의 차별 대우 등의 면모만 강조되고 가족 구성원 사이의 구체적인 유대 관계는 잘 다뤄지지 않는다. 이와 달리 일기인 <흠영>을 살펴보는 방식은, 일기 속에 담긴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의 기록을 통해 후대 사람들이 조선 시대 가정 내부의 감정 교류를 알 수 있게 한다. 과거 인물들 간의 내밀한 상호작용까지 알려주는 미시사적 탐구의 이점이 잘 드러나는 사례이다.
다. 양반의 의술 활용
거시사적 탐구에서는 단순히 당시 집필된 의학 저술이나 유행한 병 정도를 알 수 있다면, 일기인 <흠영>을 탐구하는 것은 당대 의학의 구체적인 실행 양상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본인과 아이 모두 병약했던 유만주의 가족력의 영향으로 <흠영>에는 의학 관련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다. 우선 그는 다양한 의원들의 이야기를 적었다. 2권 91p에는 안과 의원 이 노인을 찾아가 물은 내용과 그에 대한 자세한 답변이 나와 있고, 102p에는 치질 의원 장 씨를 찾아간 이야기를 전한다. 기존에는 의원들의 실질적인 활동이 잘 드러나지 않았는데, 유만주의 <흠영> 속 사례들을 탐구함으로써 실제 의원들의 진료 양태를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9)
또한 <흠영>을 통해 의료에 대한 사대부들의 관심이 표출되는 양상을 알 수 있었는데 이 또한 거시사적 탐구에서는 자세히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예컨대 유만주가 18세기 후반의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4대 서적 중 <동의보감>을 꼽은 것으로 보아, 당시 평민을 위한 간편 의서가 널리 출간되었어도 지식인 사이에서는 <동의보감>이 여전히 널리 읽혔음을 시사한다.*10)
구체적으로 당시 사람들이 의학을 현실에 어떻게 적용하였는지도 일기에 수록된 유만주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유만주는 약재학에 박학다식하였으며 침이나 뜸보다는 비싸더라도 약재를 선호하였다. 여러 의사에게 문의하여 처방전을 받거나 한 번에 두 명의 의사를 불러서 아이의 진료를 맡기기도 하였고 병의 예방도 중시하여 출산할 때의 구급 예방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11)까지 나와 있을 정도로, 아주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유만주의 기록을 통해서 동의보감의 구체적 활용 양상, 조선 사람들이 선호하던 질병 치료 방식, 의원들의 의료 행위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시사적 연구방식을 활용한다면 거시사적 탐구에서보다 더 생생한 삶의 현장 속 의학을 탐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본 탐구는 유만주의 <흠영>을 바탕으로 미시사적 방법을 통해 18세기 조선 사회 모습을 알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유만주는 조선 후기 문인으로서, 그가 남긴 1775년(영조 51)부터 1787년(정조 11)까지 13년 동안의 일기가 바로 <흠영>이다. 해당 책의 보다 구체적인 소개는 본론에 실어 둔다. <흠영>을 이용하는 까닭은, 기록이 꾸준하며 저자의 내면이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고 당대의 사회상 또한 잘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1차 사료를 직접 다루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기존 연구자에 의해 편찬된 버전이 있는 이 자료를 선택하였다. 또한 <흠영>이 쓰인 18세기는 비록 개화기만큼은 아니더라도 조선 사회가 전반적인 변화를 맞이할 시기이다. 따라서 다른 시기의 자료보다 사회의 변화에 대한 지식인층의 인식을 엿보기에 좋을 것이다.
<흠영>에 대한 탐구는 기존에 알고 있던 조선 후기 사회의 모습을 단순한 사실 나열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사람의 인식에 다가가는 기회로 삼을 것이며, 이를 통해 과거 사회의 모습을 과거 인물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을 테다.
연구 방법으로는, 유만주가 쓴 <흠영>에 대한 김하라의 편역본을 읽고 당시 조선 사회의 변화가 그의 일기 속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파악할 것이다. 편역본을 참고한 부분은 따로 각주 없이, 내주로만 표기할 것이다. 편역을 맡은 김하라의 다수의 선행연구와 더불어특정 주제에 집중하고자 <흠영>을 활용한 기타 논문을 참조하기로 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18세기 조선 사회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흠영>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본다. 즉, 18세기 조선 사회에서 기존에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을 알아내려는 것’이 아닌, 당시 사회의 변화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탐구하는 것이 본 탐구의 목표이다. 조선의 사회 변화로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룰 것이다. 알려진 조선 후기의 변화들이 <흠영>에서도 그려질 경우, 어떤 방식으로 다뤄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변화한 사회 모습을 어떤 논조로 언급하고 있는지, 그에 대한 당대인들의 가치관 및 문제의식은 무엇인지를 알아볼 것이다.
또 결과적으로는 이렇듯 개인의 기록에 의존하는 미시사적인 연구가 기존의 거시사적 연구와 비교해서 어떻게 다른지를 밝힐 것이다. 미시사적 연구만의 시각 등 장점 위주로 서술하되, 탐구 중 거시사적 방법보다 미진한 부분을 발견할 경우 이 역시 언급하기로 한다.
- 유만주의 <흠영> 소개
유만주는 1755년에 태어나 서울에서 살다가 34살이 된 1788년에 죽었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성과는 없었고, 그와 교유한 인물들도 이후의 글에 그를 거의 언급하지 않을 만큼 희미한 존재감을 지녔다. 유만주는 스무 살의 겨울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24권의 결과물을 남겼는데, 그가 죽고 난 후 남은 일기를 유만주의 아버지 유한준이 편찬한 것이 <흠영>이다. 유한준은 유만주를 고요한 성격으로 그리며, 속물적인 당대 양반들을 혐오하고 자신을 바로잡으며 살려고 노력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1) 이러한 유만주의 성격은 <흠영>에도 드러나, 당시 사회 현실에 대한 비관적 세계 인식과 자기 삶의 가치에 대한 무력함이 담겨있다. 김하라는 <흠영>선집을 작성할 때 각 소제목에 맞는 화제의 일기를 수록한 뒤, 단원 끝부분마다 관련 시대상을 간략하게 설명하며 유만주의 말을 풀이하는 방식으로 서술했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보다는 주제의 관련성이 크게 드러난다.
유만주는 일반적인 사대부와는 여러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만연한 속물성을 경계하고, 과거제 및 직업 세습의 개혁 필요성을 인식했으며, 문학관의 측면에서도 독특한 가치관을 지녔고 그 때문인지 주변인과 활발히 교류하지 못하다가 이른 나이에 죽었다. 따라서 <흠영>을 탐구할 때는 유만주의 특성을 기억하며 당대 사회를 읽어내야 할 것이다.
주)
1) 김하라, 「유만주 <흠영>연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논문, 2011, 3면.
참고문헌
유만주, 「일기를 쓰다 : 흠영 선집」1‧2권, 김하라 편역, 돌베개, 2015
그냥 가볍게 쓴 글입니다. 조금 어거지로 이어가는 부분들도 있어서 올릴지 말지 고민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