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경제적 측면
가. 과거제에 대한 문제의식 및 현실 순응
과거제가 조선 후기에 문란해졌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한양에 살던 선비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미시사적 탐구방법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유만주는 과거제의 가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이는 매번 과거에서 떨어지던 본인의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며, 그가 목격한 과거 시험장의 폐단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과거제의 폐해를 잘 알면서도 동시에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는 당대 사대부들의 현실이 드러난다.
먼저 그는 과거제만을 중대한 일로 여기고 합격하는 자만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세태를 비판하고(1권 120면), 과거제의 합격을 인생의 성취라고 부르는 것에 회의감을 느낀다(1권 106-7면). 그러나 이렇듯 비판을 하면서도 그 역시 스스로가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생각들에 얽매여있었다. 이처럼, 미시사의 장점은 단순하게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내면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면의식을 통해, 사대부 계층의 비판적인 견해가 있었음에도 과거제가 이후로도 한동안 이어진 원인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지식인 계층이 ‘통치계급’으로서 존재의 의의를 지니던 상황에서, 유만주는 당시 과거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직한 선비라는 잉여 지위에 놓인 자신의 처지로 소외감을 겪었다.*2) 그는 ‘열 가지가 없는 허랑한 자’로 자신을 칭하고 ‘부유(腐儒)의 무덤’이라는 암울한 말로 삶을 표현하기까지 한다.*3) 과거를 고칠 정치적 힘도 없는 무력한 상황이고, 현실 개혁의 필요에 대한 인식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복잡한 심리 상태는 미시사적 탐구를 했기에 알 수 있는 요인들이다. 역사적 상황에 관해 거시사적 탐구가 알려주는 지식을 넘어서, 당시 사회를 내부인의 관점을 빌려 겪어보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또 거시사적 탐구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당시의 혼란했던 과거제 운영의 구체적 모습도 그의 일기로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과거를 치러 상경하는 어려움을 전하고, 답지를 빨리 내는 것만이 중요해져서 시험장에 먼저 들어가려는 몸싸움이 벌어지던 현장을 묘사하며, 이를 지켜보는 하층계급의 비웃음에 저자도 동조하고 있다. 과거 시험의 금지 조항들이 유명무실해진 상황도 제시된다. 응시생을 따라온 종자들도 많았고, 책 구절을 베껴 써오는 부정행위도 이루어졌으며, 공부할 때 편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시험관들은 진정으로 우수한 답안지를 가려내고 있지 않아 ‘과거제가 더욱 종잡을 수 없게 되었’(1권 123면)다고도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도 드러난다. 세상에는 수만 가지 재능이 있는데 과거 시험은 한가지일 뿐이므로 제도적으로 개선될 필요가 있다며, 반복해서 낙방한 자는 합격 처리해주는 송나라의 ‘주명 제도’를 추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주변의 평가를 신경 쓰며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그만두지 못한다. ‘시험장에 나아갔다가 남들을 따라 물러나’는(1권 124면) 것만을 반복하는 그는, 과거 시험은 어떠한 계책도 되지 못한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처럼<흠영>은 늘 과거 시험에 낙방하는 한양 거자가 느끼던 비판의식과 이에 섞인 현실 순응이 구체적인 언어로 드러나기에 미시사적 탐구에 걸맞은 사료라 할 수 있다. 이는 선비 하나의 태도임과 동시에 그가 살고 있던 현실이 만들어낸 모습이기도 할 테다. <흠영>을 읽으면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데, 만약 구체적인 내면의식에 대한 표현을 읽어나가지 않고 거시사적으로만 탐구한다면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 경제 문제에 대한 인식
유만주가 살던 조선 후기는 가난이 팽배하여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이러한 부의 편중이 다른 사회 폐단으로도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거시사적 탐구를 통해 그러한 시대 상황을 알 수 있다면, 양반들도 가난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양반 본인은 어떻게 여겼는지를 유만주의 일기를 보며 알 수 있다. ‘빈궁한 선비는 생계를 이어갈 도리가 없’다는(2권 39면) 말에서는 양반의 경제적 몰락에 대한 비관적 현실 인식이 드러난다. 양반 중 궁핍한 자는 오히려 신분이 낮은 자보다 하찮아지며, 가난이란 사형선고라는 생각까지 한다. 이러한 생각은 그가 쓴 고종사촌 형의 제문에도 담겨있다(2권 106면). 이처럼 미시사적 탐구를 통해, 경제적으로 몰락하던 계층 내부에서 당대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또, 당시 세태에 대한 나름의 분석이 이루어지는 양상도 유만주의 사례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우선 그는 양반들의 경제적 몰락을 조선의 직분 세습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연결짓는다. 선비가 상공업을 하찮게 여기며 차라리 굶는 것을 택하는 풍습이 편협하다는 그의 생각은 꽤 개혁적이다. 그는 재화의 절대적인 ‘양의 부족’이 아닌 ‘분배’의 문제에 주목한다. 도고의 독과점을 통한 재산 축적과 부자들의 사치로 나머지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진다는 인식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신분제에 따른 직업 가치관도 국가적 가난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양반은 부자든 몹시 가난하든 생산에 참여하지 않고, 생산을 맡은 하층계급은 생산할 수단이 부족해서 생계를 이어나가지 못하며 양측 모두에게 문제가 되고, 이는 국가의 가난으로도 이어진다고 구체적인 판단을 내린다.*4) 이처럼, 당시 사회에 대해 양반 계층이 그저 틀에 갇힌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신념과 고민을 지녔다는 사실을 미시사적 탐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직업의 상하관계를 비판하면서도, 유만주의 시선은 사대부의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상민‧천민들이 양반을 칭하는 것을 기강이 무너졌다고 표현하고 이를 바로잡지 않는 관료들을 한심하게 여긴다.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을 이야기하면서도 양반으로서 하층민의 성장에 반발하고 위기의식을 느끼는 모습이 이중적이다. 경제적 현실을 인식하고 심각성을 느끼지만, 사회적인 신분의 우월성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대부 계층의 가치관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 역시 일기인 <흠영> 탐구의 특성이다.
2. 한양에 사는 거자의 생활상
가. 독서의 향유 양상
유만주는 열성적인 독서가였다. 따라서 흠영의 미시사적 탐구를 통해 독서의 다양한 양상을 알아볼 수 있지만 동시에 유만주만의 특성이 짙게 묻어나 있어 일반화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하더라도 한계를 인식한 상태에서 당시 한양의 거자가 어떤 의견을 가질 수 있었는지 확인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본다. 소수 의견의 확인 역시 미시사적 탐구이기에 가능한 것일 테다.
우선 <흠영>을 통해 당시 만연했던 의고적 문학관에 비판적인 입장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당대의 일반적인 의견은 금문을 고문보다 낮게 평가하는 의고적 문학관이었지만, 유만주에게 고인의 옛글을 본받는 진정한 방법은 ‘고인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지, 글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었다.*5) 더불어, 의고적인 풍습을 깨고 새로움을 추구한 중국의 문인 전겸익을 칭찬하는 그의 모습은 당대 유명 문인들이 사대부들 사이에서 어떤 기풍으로 인식되고 있었는지, 또 그들에 대한 사대부들의 평가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끔 한다.
또한 <흠영>에서는 다른 기록들과 달리 소설에 대한 긍정적 의견이 다수 존재한다. 소설이 무척 인기였던 상황 속에서, 당대 문인들은 풍기를 문란하게 만들고 작문에도 악영향을 끼친다며 소설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와 달리, 유만주는 소설이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고 이해하기 쉬워 사람들의 성정을 깨우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며 옹호했다.*6) 거시사적인 탐구로 소설의 유행 양상과 몇몇 유명 소설의 제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 미시사적으로 보면 해당 소설들에 대한 양반의 평가를, 유만주와 같은 특수한 의견까지도 구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또 숭유억불의 시대로 알려진 조선 사회에서 양반들이 불경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도 <흠영>에서 드러난다. 유만주는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했는데, 그중에는 불경도 있었다. 그는 불설은 사람은 속이는 것이며, 인과응보를 강조하여 혹세무민한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그의 불경 읽기는 사상적 체험의 일환이 아닌 편찬과 논평의 지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졌다.*7) 그러나 이후에는 연이은 과거 낙방과 아들의 죽음 등의 불운을 겪으며 불교를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8) 당시 불교가 정책상 탄압받았다는 것은 널리 퍼진 상식이지만, <흠영>의 사례는 사대부들이 단순히 마음을 다스리는 방책으로는 불교를 수용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종교와 같이 내면과 밀접히 얽힌 분야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살펴보려면 미시사적 탐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나. 가정에 대한 애착
<흠영>에 대한 미시사적 탐구를 통해, 기존의 서술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던 조선 시대 부자간의 유대 관계를 알 수 있다. 유만주가 <흠영>을 훗날 아들이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쓴 만큼, 글에서도 아들에 대한 사랑이 묻어나는 부분이 다수 존재한다. 아들 ‘구환’(이후 ‘교환’으로 개명)이 홍역, 천연두 등 병환에 걸릴 때마다 간호하는 모습이 드러나고,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는 것은 생활환경과 양육 방식에 달려 있다며 그저 꾸짖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교환이 요절한 후에는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펼치지 못하고 구속된 채 조심스럽게 살아 병이 났다며 자신을 탓한다. 일기가 아이를 떠올리게 해서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아이와 연결된 느낌이기에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들의 무덤에 갈 때의 상념은 비통함을 그대로 보여주며, 아들이 죽은 후에도 예전과 다름없는 자신의 모습을 모질다 평하는 장면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상황 속 감정을 가감 없이 묘사한다는 점에서 ‘일기’의 특성이 드러난다.
조선 시대의 가정생활은 가부장제의 확립, 여성의 차별 대우 등의 면모만 강조되고 가족 구성원 사이의 구체적인 유대 관계는 잘 다뤄지지 않는다. 이와 달리 일기인 <흠영>을 살펴보는 방식은, 일기 속에 담긴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의 기록을 통해 후대 사람들이 조선 시대 가정 내부의 감정 교류를 알 수 있게 한다. 과거 인물들 간의 내밀한 상호작용까지 알려주는 미시사적 탐구의 이점이 잘 드러나는 사례이다.
다. 양반의 의술 활용
거시사적 탐구에서는 단순히 당시 집필된 의학 저술이나 유행한 병 정도를 알 수 있다면, 일기인 <흠영>을 탐구하는 것은 당대 의학의 구체적인 실행 양상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본인과 아이 모두 병약했던 유만주의 가족력의 영향으로 <흠영>에는 의학 관련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다. 우선 그는 다양한 의원들의 이야기를 적었다. 2권 91p에는 안과 의원 이 노인을 찾아가 물은 내용과 그에 대한 자세한 답변이 나와 있고, 102p에는 치질 의원 장 씨를 찾아간 이야기를 전한다. 기존에는 의원들의 실질적인 활동이 잘 드러나지 않았는데, 유만주의 <흠영> 속 사례들을 탐구함으로써 실제 의원들의 진료 양태를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9)
또한 <흠영>을 통해 의료에 대한 사대부들의 관심이 표출되는 양상을 알 수 있었는데 이 또한 거시사적 탐구에서는 자세히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예컨대 유만주가 18세기 후반의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4대 서적 중 <동의보감>을 꼽은 것으로 보아, 당시 평민을 위한 간편 의서가 널리 출간되었어도 지식인 사이에서는 <동의보감>이 여전히 널리 읽혔음을 시사한다.*10)
구체적으로 당시 사람들이 의학을 현실에 어떻게 적용하였는지도 일기에 수록된 유만주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유만주는 약재학에 박학다식하였으며 침이나 뜸보다는 비싸더라도 약재를 선호하였다. 여러 의사에게 문의하여 처방전을 받거나 한 번에 두 명의 의사를 불러서 아이의 진료를 맡기기도 하였고 병의 예방도 중시하여 출산할 때의 구급 예방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11)까지 나와 있을 정도로, 아주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유만주의 기록을 통해서 동의보감의 구체적 활용 양상, 조선 사람들이 선호하던 질병 치료 방식, 의원들의 의료 행위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시사적 연구방식을 활용한다면 거시사적 탐구에서보다 더 생생한 삶의 현장 속 의학을 탐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주)
2)김하라, 「한 주변부 사대부의 자의식과 자기규정 - 유만주(兪晩柱)의 『흠영』(欽英)을 중심으로」, 규장각 No.40,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2, 150-152면.
3)김하라(2012), op.cit., 156면.
4)김하라(2011), op.cit., 61면.
5)배기표, 「通園 兪晩柱의 文學論 : 『欽英』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한문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25-26면.
6)배기표, op.cit., 47-50면.
7)박상란, 「18세기 한 거자(擧子)의 불경 읽기 - 유만주의 『흠영』을 중심으로」, 동방학지 Vol.177,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6, 374면
8)박상란, op.cit., 390면.
9)김호, 「8세기 후반 居京 士族의 衛生과 의료 : 『欽英』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No.11, 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1998, 122면.
10)김호, op.cit., 126면.
11)김호, op.cit., 136-137면
참고문헌
유만주, 「일기를 쓰다 : 흠영 선집」1‧2권, 김하라 편역, 돌베개, 2015
권운영, 「유만주(兪晩柱) <흠영(欽英)>에 나타난 중국고전소설 읽기」, 中國語文論叢 Vol.91, 중국어문연구회, 2019
김하라, 「유만주의 <흠영>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김하라, 「한 주변부 사대부의 자의식과 자기규정 - 유만주(兪晩柱)의 『흠영』(欽英)을 중심으로」, 규장각 No.40,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2
김하라, 「『흠영(欽英)』에 수록된 의료 소재 야담에 관한 연구」, 漢文學論集 Vol.45, 근역한문학회, 2016
김호, 「8세기 후반 居京 士族의 衛生과 의료 : 『欽英』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No.11, 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1998
박상란, 「18세기 한 거자(擧子)의 불경 읽기 - 유만주의 『흠영』을 중심으로」, 동방학지 Vol.177,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6
배기표, 「通園 兪晩柱의 文學論 : 『欽英』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한문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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