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인식(어쩌면 다소 뻔한 이야기)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정체성이, 섣불리 알 수 있다고 말해도 되는 영역의 것일까? 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먼저 우리가 타인과 자신을 향해 어떤 모순적인 태도를 지니는지를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쉽게 타인을 정의 내리곤 한다. ‘저 사람은 냉정해’, ‘그 친구는 소심하지만 착해’ 같은 선언이 그 사례이다. 하지만 정작 다른 사람이 자신을 그런 식으로 정의 내리면, 변명의 말로 대응하려 한다. 자신은 그렇게 단순한 몇 마디 말로 표현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남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남들은 우리를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 스스로가 ‘아주 많은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남들은 알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면적인 나'에 대한 모순적 인식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의 不定성과 다면성은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그렇듯 다면성을 인식하면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나름대로 정의내리려고 한다. ‘나는 이럴 때는 섬세하지만 또 저럴 때는 거침없는 면모도 있어’와 같은 표현을 떠올릴 수 있다. 남이 나를 평가할 때는 나의 다면성을 강조해서 그 평가를 부인하면서, 나 스스로가 나를 평가할 때는 다면성을 충분히 반영한 평가인 듯이 포장하며, 다면성을 파악 가능한 요소로 제한한다.
이는 바람직한 평가 태도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의 자아는 누가 평가하는지에 따라 그 다면성의 정도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일관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인식하기에, 우리는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누군가는 의문을 가질지 모른다.
‘우리가 무한히 다면적이라면, 무한한 모습을 아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어떠한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가. 단순히 다면성의 파악 가능성에 대한 모순적 인식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다면성이 존재하는 한 정확한 자기 인식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확한’ 자기 인식은 불가능한 것이 맞다. 그때그때 무한히 변화하는 나 자신을 어떻게 하나하나 관찰하여 정리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올바른’ 자기 인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확성이 올바름의 필수적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에 대해 알아나가려면, 나의 다면성을 모두 아우르는 포괄적 ‘나-인식’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다면적 면모 하나하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존재적 특성을 생각해보 아야 한다. 여기에서 꿈을 이용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꿈을 소원 성취라고 보았다. 이때의 소원은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바라는 것의 범위에 들어갈 수 있는 내용에는 단순한 감각적 욕구 충족에서부터, 나의 자아와 주변인과의 연결성에 대한 심오한 고민까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사실 나의 다면성을 생각하면 그 광범위성은 당연하다. 즉 꿈 속 소원의 광범위함도, 우리의 자아가 다면적임을 암시하고 있던 것이다.
-구와 원의 비유
프로이트의 꿈에 대한 창의적이고 새로운 표현들은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찰해볼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되어준다. 다만,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중에는 동의할 수 없는 주장도 많다. 그의 글은, 사례 중심으로 차곡차곡 쌓아서 만든 탑을 보는 듯하다. 그에 반대되는 사례를 제시하면 무너지고 만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제시하는 꿈에 대한 견해는 새로운 발상으로의 통로로서만 이용할 것이다. 어쩌면 결국 프로이트가 해당 표현을 쓰는 맥락과 겹칠 수도 있고, 빗나거나 아예 반대될 수도 있다. 글 첫머리에서의 ‘다면성’이라는 말은 추상적이게 다가올 수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구와 원의 비유를 이용하고자 한다.
사람은 마치 2차원 세계에서 보는 3차원의 구와도 같다. 2차원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원만을 볼 수 있고, 저것은 원이라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는 온전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2차원 세계 속 존재들의 눈에는 단순한 면으로 보일지라도, 구의 본질은 3차원의 구이다. 그리고 구와 같은 입체는 무한히 많은 2차원의 면의 집합이다. 식빵을 자를 때처럼 구를 자른다고 생각해보라. 다만 식빵과 달리 상상 속 구는 무한히 많은 단면으로 자를 수 있다. 하나의 면의 두께는 n/∞이므로 0에 수렴한다. 여기서 구를 ‘나’의 정체성으로 본다면, ‘나’라는 실체를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속성들은 무한히 많이 모여서 나를 형성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구와 구가 겹칠 때 2차원 사람들은 원끼리 만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원을 접하고 있다. 내가 접한 이것의 속성은 원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구의 어느 부분들이 접촉했는지 2차원의 사람들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이다. 구와 구가 맞닿을 때의 접촉면의 종류도 무한히 다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형성할 때, 상황마다, 대하는 상대마다, 접촉의 깊이의 정도마다, 매번 상대에게 보이는 우리의 면모와 우리에게 보이는 상대의 면모는 다른 관계 형성에서와 달라진다. 구와 구의 접초면이 매번 달라지듯이. (글 하단의 [붙임1] 참조)
-'다면적인 나'의 형성 : 프로이트의 이론을 통한 설명
그렇다면 그토록 다면적인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어떻게 숨겨지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다면성을 지녔다는 것은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면서도, 교묘히 숨겨져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너는 다면적인 사람이야. 하나의 정해진 모습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라고 말한다면 그는 기꺼이 수긍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바로 그 다면성 때문에 너는 정확한 자기 인식을 할 수 없어.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야’라고 말한다면, 그는 곧바로 반박하려 할 테다. 이는 다면성이 존재감은 드러내면서도 구체적으로 얼마만큼 다면적인지까지는 알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꿈은 그 내용을 왜곡하여 다면성을 숨기는 역할을 훌륭히 해낸다. 다면성이 얼마나 큰지 정확히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꿈은 엄격한 검열 과정을 거친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꿈에서 되풀이되는 불쾌한 감정이 소원의 존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꿈 주제나 주제에서 비롯되는 소원을 혐오하고 억압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꿈들이 왜곡되고 소원 성취가 알아볼 수 없 게 위장한다고 충분히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꿈은 (억압되고 억제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이다.>’(p.206)라고 말한다. 내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의 욕망이 있을 때, 꿈에서만큼은 그 욕망이 드러나지만 변형되어 반영된다. 예컨대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어린 소년의 소망은, 아버지가 일을 떠나서 영원히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표현된다. 짝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하는 여성의 소망은, 조카의 장례식에 가는 것으로 표현된다.
또 다른 프로이트의 표현을 보자면, ‘밝혀진 꿈-사고 가운데 최소한의 것만이 꿈속에서 표상 요소를 통해 표현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압축이 <생략>을 통해 일어난다고 추론해야 할 것이다. 꿈은 꿈-사고의 충실한 번역이나 원래 그대로의 투사가 아니라 극도로 불완전하고 결함 많은 묘사이다.’(p.339)라고 말하고 있다. 꿈은 우리의 속내를 고스란히 투영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원래 그대로의 특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결함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왜곡, 전위, 생략과 같은 검열은 우리에게 다면성이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다면적인 모습이 있기에, 한 면에서의 ‘나’가 바라는 나의 욕망이 다른 면의 ‘나’로서는 차마 드러 낼 수 없는 경우도 생긴다. 우리의 자아는 수없이 다양한 면모가 집단으로 모여 하나의 단일한 ‘나’가 된 것이기에, 그 각기 다른 면모들이 바라는 것, 생각하는 것, 옳다고 판단하는 것, 세상을 보는 방식 등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즉 다면적인 내가 형성된 것은 내 자아가 다양한 면모가 모여서 만들어져각기 다른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면성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
그렇다면 이러한 다면성에 대해 논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중요할까. 이는 앞에서 본 모순적인 태도를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타인이 우리를 인식하는 상황에서는 우리의 다면성을 강조하지만, 내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상황에서는 다면성을 과소평가한다. 즉 한 명의 인식에 대해서 서로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다. 이를 바로잡을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각각의 상황을 심도 있게 분석하여, 무엇이 우리의 다면성 고려 정도를 결정지었고 그러한 고려 정도가 우리의 자기 인식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렇게 분석한다면, 두 잣대로 하나의 존재를 판단할지라도 서로 다른 기준들에 휘둘리지 않고 넓은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지나친 품이 든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기에 두 번째 방법이 대두된다. 바로, 애초에 다면성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남이 나를 판단하는 상황, 내가 나를 판단하는 상황에서의 이중 잣대의 문제는 없던 일이 된다. 이러한 두 번째 방법, 즉 ‘자신에 대해 인식할 때 다면성을 충분히 고려 하는 태도’를 성취하는 데에는 꿈이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꿈은 다면성이 숨겨지는 방식의 하나임과 동시에, ‘숨겨진’ 형태로 ‘표출’되는 방식 중 하나이다. ‘숨겨져 있다’라는 표현에서 ‘있다’라는 말에 주목하는 셈이다. 바로 이 표출이 중요하다. 꿈에서의 검열에는 우리의 다면성이 전제되어있기에, 이는 반대로 소원 성취의 검열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스스로의 다면성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나라는 존재의 다면성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 다면성이 꿈 속 소원 성취의 왜곡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다면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무한히 다면적이기에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나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알기 위한 방안은, 다면적인 면모 하나하나를 뜯어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면적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라고도 이야기했다. 그렇듯 다면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꿈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꿈이 지닌 정밀성 덕분이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그것(꿈)은 완벽한 심리적 현상이며, 정확히 말해 소원 성취다. 또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깨어 있는 동안의 정신 활동 속에 배열될 수 있으며, 아주 복잡한 정신 활동에 의해 형성된다.’(p.163)라고 말한다. 이 표현은 꿈이 그저 무질서한 이미지의 나열이 아님을 보여준다. 또, ‘자극에 대한 허용 가능한 해석 중에서 영혼 안에 숨어 있는 소원 충동과 가장 잘 결합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런 식으로 명백하게 결정되어 있으며, 자의에 맡겨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릇된 해석은 착각이 아니라 핑계이다.’(p.289)라는 표현에서도, 꿈은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꿈의 형성 과정에서는 숨겨진 소망을 가장 잘 표현하려는 노력이 전개되고 있음을 말한다. 이 역시 우리의 ‘영혼 속에 숨어 있는’ 소망, 즉 다면적인 소망을 꿈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근거이다.
결과적으로, 꿈을 통해 다면성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에게 무한한 다양한 면모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는 기존에 알고 있던 자신이 그저 정체성의 단편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고, 나의 정체성을 하나로 정의내리지 않는 태도로 이어진다. 그것으로 충 분하다고 말하고 싶다. ‘올바른’ 자기 인식이란 거창한 게 아니다. 내게 변화하는 여러 면모 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2차원의 세계에서 원만 보일지라도 그 실체는 ‘구’라는 것을 아 는 것. 이는 전체로서의 나를 조망하는 길이기에, 내가 누구인지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방법이 된다.
[붙임 1]
<그림1> : 2차원의 존재에게는 구가 원으로 인식된다. 이는 단편적인 나의 몇몇 면모만으로 ‘나’라는 정체성을 설명하려는 태도에 비유된다.
<그림2> : 구 두 개의 접촉이 2차원에서 인식될 때의 모습은, 그저 원 두 개의 만남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할 때, 지금 보이는 그 사람의 모습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하지 만 이는 사실 우리가 모두 ‘구’와 같다는 본질을 잊어버린 태도이다.
<그림3> : 구 두 개가 만났을 때, 접촉면의 크기, 위치, 각도 등은 무한히 다양하다. 이처럼 우리는 누군가와 만날 때, 즉 관계를 형성할 때, 무한히 다른 면모를 보일 수 있다. 나의 잠재된 면모도 무한하고, 타인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우리의 자아 자체가 무한히 많은 모습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나 교양수업 과제글로 썼던 보고서입니다.. 과제들을 모아두었던 폴더가 실종되어서(?)
학교 ETL에서 새로이 다운받아서 티스토리를 글 저장 아카이브..로 써먹는 중....입니다.
티스토리에 맞게 소제목들도 좀 붙이고 이탤릭체도 쓰고 밑줄도 긋고...
생각글 폴더에 올릴까 하다가... 책 기반이니까 일단 책 리뷰 게시판에...
그래도 일단 생각글에서처럼 생각의 출처를 남겨놓자면..
구와 원의 비유 생각의 출처는
고1 때 굉장히 좋아하던,, 웃는 모습이 너무 예쁘고 목소리가 천사같았던 영어쌤을 보면서
"물론 저 쌤이 학생들을 대하는 모습은 본인의 친한 지인들을 대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겠지? 그렇지만 그 중에서 '어떤 모습은 진짜고 어떤 모습은 가짜다'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구끼리 맞닿을 때의 접촉면이 다양하듯이 그냥 다양한 면모가 있는 것일 뿐이니까.. 나는 '학생들이라는 구와 맞닿을 때'의 저 쌤의 모습이 좋은 거야! 사실 다른 모습은 딱히 알고 싶지도 않고 중요치도 않아!"
라고 생각한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ㅎㅎ
거의 영어쌤 팬이었네요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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