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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결론

 

본 글에서는 농사개량의 추진 주체와 추진 대상의 비동일성, 소위 ‘식민성’이 어떤 영향을 가져왔는지를, 권업모범장의 성격과 이후 전개된 수도우량품종 도입을 통해 살펴보았다.

 

우선 권업모범장의 설립과 그 활동에서의 일본 중심적인 특성을 알 수 있었다. 권업모범장은 한말에 한국 정부의 농사시험장 설립을 통한 농업지배를 막으면서 설립되었 고, 이후 식민지기에 조선 총독부 산하로 편입되어 일본 농업 기술을 한국에 강제적 으로 도입하는 방식의 농사개량을 진행하였다. 권업모범장에서의 연구는 조선 전통 농업 기술과 재래품종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닌, 일본의 것을 가져와 그 중 적합한 것을 그대로 이식하는 방식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러한 권업모범장에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식민지 본국의 필요 충족이었다. 이어서 구체적인 사업으로서 우량품종 도입에 대해 살펴보았다. 대체로 우량품종도 입은 생산성 증대를 가져왔지만, 그럼에도 재래품종은 驅逐되고 소수의 우량품종으로 통일되는 등, 전반적인 농사개량 사업의 식민지적인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일본의 기술을 그대로 이식해 오는 과정에서 조선의 농업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품종이 장려되어 생산성이 정체되거나, 일본 기술자들의 기술 부진으로 미단작화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역시 우량품종 도입에 있어서 그 ‘추진 주체’와 ‘추진 대상’ 이 ‘일본’과 ‘조선’으로 달랐기 때문에, 농업기술 이식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파 악할 수 있다.

 

또, 우량품종의 도입 역시 농사개량 사업의 일부였기에, 전반적인 농사개량이 이러한 ‘식민성’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농사개량 사업은 우선 그 목표 측면에서도 식민지 본국의 사회적 요구가 짙게 반영되었다. 또, 조선의 재래 농업을 경시하며 일본의 기존 연구의 방향성과 기술이 도입되었다. 조선의 미단작화가 그러한 두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본 글은 일제 식민 지배가 조선의 농업 상황에 끼친 영향을 다루되, ‘식민지 억압’의 차원보다는 식민 지배가 가져온 사업 주체-대상 간 비동일성이라는 특수한 상황의 측면에서 파악하고자 했다. 그러한 비동일성이 사업 과정에 깊이 반영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고, 추진 주체의 의도를 추진 대상에 적용하려 하며 여러 부정적 영향이 야기되기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참고문헌

김도형, 「勸業模範場의 식민지 농업지배」, 한국근현대사연구3, 한국근현대사학회, 1995

김도형, 「일제강점 하 농업기술기구의 식민지 농업지배적 성격」, 농업사연구4-1, 한국농업 사학회, 2005

김영진‧김상겸, 「한국 농사시험연구의 역사적 고찰 -권업모범장을 중심으로-」, 농업사연구 9-1, 한국농업사학회, 2010

류기덕, 「日帝下 朝鮮農業政策의 展開와 農家經濟樣相」, 社會科學論叢18-1, 계명대학교사 회과학연구소, 1999

류정선, 「조선총독부의 밭작물 개량증식 정책」,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2

소순열, 「식민지기 전북에서의 수도품종의 변천」, 농업생명과학연구23, 전북대학교 농업과학 기술연구소, 1992

소순열, 「식민지기 전북에서의 수도품종 (水稻品種)의 시험연구와 그 보급 -식민지농업기술의 주체성해명을 위하여-」, 全羅文化論叢5,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 1992

우대형, 「일제하 미곡생산성의 추이에 관한 재검토」, 經濟史學58, 경제사학회, 2015

홍금수, 「일제시대 신품종 벼의 도입과 보급」, 대한지리학회지 38-1, 대한지리학회, 2003


써보았던 과제글 중 가장 재미있게 쓴 글이자 교수님께 '주제의식이 뚜렷하다'라는 칭찬을 거의 처음으로 들은 글. 하지만 동시에,, 나만의 생각과 해석은 없고 이미 진행된 연구의 짜집기에 불과해서 현타도 왔던 글. 학부생 수준에선 어쩔 수 없...다고 위안하려 해도 주변 사람들은 나름 본인만의 문제의식과 참신한 생각을 가지고 글을 쓰는 것 같아서 우울했었던 기억이,,,

그래서 전과를 해버렸다!(극단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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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제 품종개량 사업의 결과

3.1. 우량품종 보급으로 인한 생산성의 변화

 

조선에서 쌀 생산량의 변화가 1910년대에 성장하다가 1920년대 정체하고, 1930년대에 재성장하는 것은 우량품종의 보급 상황으로 설명된다. 1910년대는 조신력에 의해 생산성이 향상되지만, 1920년대에 들어 곡량도가 수위품종이 되며 생산성이 정체된다. 그 후 1930년대에 다시 생산성이 늘어날 수 있었던 원인은 2세대 품종인 은방주의 보급과 연결되어있었다. 추가로, 남한보다 북한의 쌀 생산성 증대 속도가 더 빨랐던 원인은 우량품종 보급의 생산성 증대 효과가 북한 지역이 더 높았던 것이 통계적 분석이 존재한다. 이처럼 남북한의 생산성 증대 속도 비교를 통해서도 우량품종의 보급이 생산성의 변화와 직결되는 것을 알 수 있다.*22)

 

다만 앞서 1920년대에 곡량도의 보급이 생산성 정체를 가져왔듯이, 우량품종이 보급되는 것이 늘 긍정적 영향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시대별, 지역별로 품종에 따라 효과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1910년대에는 남한 지방의 조신력만이 우량종 보급이 생산성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고 북한 지역의 일출은 유의미한 생산성 증대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반대로 1920년대에는 북한 지방의 구미만이 증대를 가져온다. 즉 우량품종의 확산과 생산성 향상은 음의 관계를 이루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우량품종의 보급이 생산성 증대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경우에서도 구체적인 품종에 따라 그 효과의 크기는 다르게 나타난다. 1930년대에 남한에서는 은방주가, 북한에서는 육우132호가 생산성 향상에 공헌하지만, 그 효과는 육우132호가 2배 정도 높게 나타난다.*23)

 

정리하자면 우량품종의 보급은 분명히 생산성 증대에 있어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 사했지만 언제나 양의 관계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이는 1920년대의 정체기를 통해서, 그리고 1930년대 이후의 상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930년대에 은방주가 보급되기 전, 1930년대 초반의 장려품종이 쌀 생산성 증대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내지 못한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쌀 우량품종이 오히려 생산량을 절감하기도 했다는 것이다.*24)

 

이처럼 우량품종의 보급이 생산성에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준 것은 권업모범장의 식민지 본국 중심성에서 야기된 연구 소홀에서 일부 기인한다. 앞장에서 살펴봤듯이 권업모범장은 기본적으로 깊이 있는 연구 없이 일제 농업 기술을 그대로 조선에 도입함으로써 농사개량을 꾀하고 있었다. 앞서 본 조신력에서 곡량도로서의 주력 품종 교체에서도, 둘 사이의 내비성 차이를 충분히 연구하지 못하여 비료가 증대되는 시대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多肥 시대로 넘어옴에 따라, 농민들은 그나마 조신력보다 내비성이 나은 곡량도로 품종을 교체하며 대응하고자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내비성‧내병성을 갖춘 품종으로서의 은방주를 1922년에야 도입하지만, ‘다비 다수확 품종’으로서 장려된 것은 1930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은방주가 장려품종이 되자마자 재배면적이 급격히 늘고 곡량도는 급격히 면적이 줄게 된 것도 곡량도는 당시 농업 현실에 부적합한 품종이었음을 보여준다.*25)

 

다만 주의할 점은, 이러한 연구에서의 실책을 ‘의도적인 식민지 탄압'의 방향으로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곡량도의 교체로 생산성이 정체된 것은 일본의 의도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일본 농업기술자들이 조신력과 곡량도를 장려품종으로 선정할 당시는 少肥가 일반적이었으므로 내비성을 크게 고려하지 못한 것은 불가피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생산성의 정체라는 결과 자체보다는 그것을 야기한 원인으로서의 ‘일제 농업 기술의 이식되던 형태’의 문제에 주목하고자 한다.

 

 

3.2. 전반적인 농사개량에서의 식민 지배 상황의 영향

 

3.1 단락에서 우량품종의 생산성을 통해 ‘우량품종의 도입’이라는 구체적인 분야 에서 일제와 조선 간 식민지 관계가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봤다면, 아래의 내용은 식민 지배의 상태가 전반적인 농사개량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살펴볼 것이 다. 우량품종의 도입 역시 농사개량 사업의 하나였기에, 둘은 같은 맥락에 있을 수밖 에 없다. 식민지적 특성은 크게 사업의 목표 수립 측면, 그리고 연구 및 기술 도입의 측면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식민지 본국의 사회적 요구에 따라 농업 기술의 시험 연구가 이루어졌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정책의 추진 주체가 처한 사회적 상황이 정책에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 일로서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식민 지배라는 상황에서는 정책 추진 주체 는 일본이지만 추진의 대상은 한국이기에, 그러한 사회적 요구의 반영이 ‘구조적인 지배’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일제 농업기구에서는 일제가 한국 농업을 구조적으로 지배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들을 펼쳐나갔다. 특히 그러한 특징은 1910년대 후반에서 20년대 초의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1917년 여름부터 일본에서 쌀값이 급격히 오르지만 쌀 수확은 감소한다. 1차대전 특수로 인한 인플레이션, 도시노동자의 쌀 소비 증가, 쌀 상인들의 담합과 투기까지 벌어지며 1918년 7월에 쌀 폭동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또한, 이 시기 한국에서는 1919년에 경기도 지역 중심으로 가뭄이 심하여 농민의 구제가 시급해졌다. 이러한 식량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농산물 생산의 증대가 요청되었다. 덧붙여, 1차 세계대전의 총력전 형태를 보며 식량 자급의 중요성을 일본 정책담당자들이 인식했다는 측면도 있었다. 이러한 일제의 필요 하에 산미증식계획이 수립, 전개되어 한국에서의 농사개량은 일제의 농업발달과 식량의 증산에 궁극적으로 목표를 둔 것이다.*26)

 

둘째로, 일본 환경에 맞추어 식민지 본국에서 축적된 연구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조선의 기술을 경시하고 일본에서 기술을 수입해오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조선에 맞는 기술 개발이 아니라, 일본 농업 기술을 권업모범장에서 시험해본 결과 조선의 상황에도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것을 그대로 이식할 뿐이었다.*27) 이러한 식민지 본국 위주의 조선 농업 개편의 두 가지 특징은, 조선 농업구조의 米單作化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일본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한국의 쌀 증산’에만 초점을 맞추어, 농업기구 내 기술자들은 한국의 벼농사에 적용할 벼 품종, 재배 방법 등에 집중하여 벼농사에 편중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에 비해 밭농사의 발전은 부진했다. 밭농사는 집중적인 육종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고 식민지 초기와 후기를 비교했을 때 일정 면적당 생산량이 증가한 것은 5개 품종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밭작물은 생산량이 정체되거나 오히려 줄어들었다. 일본의 농업기술자들은 주로 벼농사에 전문이었으므로, 조선 밭농사를 잘 알지 못했으며 재래 농법에 대한 무지는 그에 대한 경시로 이어져 벼농사 부분의 지도가 제대 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28) 더불어 건조한 땅에서의 농업 경험이 부족했던 일본 기술자들의 밭농사 기술 개발 능력의 부진이 그대로 조선에까지 이어진 것도 밭작물 생산량 증대 부진의 요인이다.*29)

 

1910년대 후반 여러 쌀 폭동 등의 식량문제로 인해 식량 위기 극복이 요구될 시기에는 권업모범장 서산지장을 설치하며 밭작물에 관한 관심을 전개해 나가는 식으로 태도가 변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산미증식계획의 실행으로 쌀 생산을 중심으로 하게 되어, 실제 농업 현장에서 식량용 밭작물 장려 정책은 뒤로 밀려났다. 또 일본에서 식량문제가 해결되어 가며, 굳이 밭작물의 증산까지 시행할 필요가 없게 되기도 했다.*30)

 

이처럼 미단작화의 경향은 식민지 본국인 일본의 목적과 요구에 좌우되며, 일본의 연구 상황을 그대로 이식할 뿐이었던 당시 농사개량 사업을 잘 보여준다.


주)

22) 우대형, 위의 글, 83면.

23) 우대형, 위의 글, 76-79면.

24) 김도형, 「일제강점 하 농업기술기구의 식민지 농업지배적 성격」, 농업사연구4-1, 한국농업사학회, 2005, 7면.

25) 우대형, 위의 글 79-80면

26) 김도형(2005), 위의 글, 11-12면.

27) 소순열, 「식민지기 전북에서의 수도품종 (水稻品種)의 시험연구와 그 보급-식민지농업기술의 주체성 해명을 위하여」, 全羅文化論叢5,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국소, 1992, 11-12면.

28) 류정선, 위의 글, 10면

29) 소순열, 「식민지기 전북에서의 수도품종의 변천」, 농업생명과학연구23, 전북대학교 농업과학기술연구소, 1992, 11면.

30) 류정선, 위의 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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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벼 품종의 변화 양상

2.1 벼 품종별 특성

 

일제강점기 동안, 가장 넓은 재배면적을 차지하는 우량품종은 시기에 따라 변화한다. 그 변화 양상은 벼 품종의 특성, 그리고 해당 시기의 사회적인 요인들과 얽혀 있으 며, 이를 구체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주요 벼 품종들의 특성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조신력(早神力)은, 권업모범장이 김제군 백가정길전농장에서 얻어서 경기도, 충남, 충북에 많이 보급된 품종이다. 비료가 적은 환경에서도 비교적 많이 생산되는 것이 장점이지만 동시에 비료가 많아지면 도열병에 약해서 전멸하기도 한다. 즉, 비료를 증대하는 경향에서는 재배에 부적합하다. 품질은 중급이었다.

 

둘째로 곡량도(穀良都)는, 경북에 처음 들어와서 試作하였지만 구체적인 도입 경로는 불확실하다. 해충의 피해에 약하고, 바람과 비에 잘 쓰러진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 대신 척박한 환경에 잘 견딜 수 있었으며 회복성이 강했다. 소량의 비료는 성장을 도왔으나 다량은 거부 반응을 야기했다. 낟알이 커서 품질이 양호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셋째로 다마금(多摩錦)은, 1908년 권업모범장이 試作하고 조선 남부지방에 보급한 품종으로서, 내비성이 약했지만 척박한 토양이나 가뭄에 강했으며 품질이 뛰어났다.

 

넷째로 은방주(銀坊主)는 1922년에 익산군 오산면의 이식 농가가 원종을 가져와 재배한 것이 시작점이다. 바람과 비에 쓰러지는 것이 적고, 내병성과 내비성이 강했다. 다만 품질과 맛이 낮았다. 그렇지만 중소립형의 낟알이 1930년대의 쌀 시장의 선호와 잘 맞아 선호되었다.

 

다섯째로 풍옥(豊玉)이 있다. 은방주를 이용하여 개량된 품종으로서 소립종이며, 비료의 양과 성장 속도가 비례했으며 추위에 잘 견뎠다.*10)*11)

 

이러한 다섯 가지 주요 품종 외에도 북한 지역에 널리 재배되었던 일출(日出), 구미(龜尾)도 재배면적에서 상위 5대 품종을 구성하기도 했다. 이 중 본 글의 논의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것은 조신력, 곡량도, 은방주이다.

 

 

2.2. 우량품종 보급 과정의 전개

 

일제의 벼 종자 보급정책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한말부터 1925년까지를 제1기로 구분하며, 다양했던 재래품종을 소수의 품종으로 바꾸고 생산되는 쌀의 질을 높이는 시기라고 말한다. 1926년 후를 제2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산미증식계획의 실시와 함께 더 저항력 있고 생산성 높은 벼 품종을 추구하는 시기로 변경되었다고도 본다.*12)

 

조선의 재래품종은 그 특성상 비료가 많고 물이 풍부한 경우에는 일제의 우량품종보다 생산성이 떨어지지만, 추위를 잘 견디는 등 조선 기후에 적합하며 이삭이 빨리 여물며 발아력이 강하다는 장점도 존재했다.*13) 그렇지만 일제는 조선의 재래 벼 품종보다는 일본의 품종으로 한반도 농업의 품종을 통일시키는 사업으로써 우량품종을 키워 보급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농민들은 일본의 품종에 대해 의문을 가졌지만, 일제는 생산성을 길러야 한다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량품종을 장려하며 권업모범 장과 종묘장을 통해 정책을 이어나갔다.*14) 이는 전반적으로 일본 품종이 조선 품종보다 생산성이 높았던 것의 결과이므로 단순한 억압적 농사개량 정책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일 테다. 다만 일제의 목표가 농업 정책의 핵심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 재래 품종의 보존보다는 일제 농업의 이식이 중심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목표의식에 따라 점차 조선 내 재래품종 대신 우량품종을 재배하는 경향이 지배적이게 된다. 전북의 통계를 사례로 보면, 일본 우량품종을 재배하는 비율은 1912년 10.6%에서, 1917년은 60.6%, 1937년에는 88.6%, 1940년에는 96.9%로 크게 증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비해 조선 전통 재래품종은 1912년의 89.4%에서 1940년의 3.1%로 크게 감소하였다. 즉 재래품종이 밀려나고 소수의 품종으로 통일되는 형태로 우량품종이 확산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우량품종별 작부 면적을 비교함으로써 소수 품종으로 통일되는 경향을 전북의 사례를 통하여 살펴보겠다. 전북이 사례로서 적합한 이유는, 우량품종 으로의 벼의 유전적 획일화가 잘 드러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전북에서 우량품종의 재배 비율이 전체 재배의 80%에 달하기까지 걸린 기간 자체가 전체 조선은 20년 정도가 걸렸으나 전북은 그 절반인 10년이 걸릴 만큼, 소수 품종으로의 통일이 선도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처음에는 수위 자리*15)에 고천수(高千穗)가 있었지만 그러한 경향은 길게 가지 못하고 1912년에 조신력이 1위를 차지한다. 1920년에는 곡량도가 1위를 11년간 유지되다가 1931년에 은방주가 10년 이상 1위를 하면서, 전북에서 벼 재배면적의 78%를 하나의 품종이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상위 2~3개의 품종이 우량품종 재배면적의 80%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1930년대 이후부터는 전체 벼 재배면적의 80%를 차지하여 소수 우량품종으로의 통일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6)

 

 

2.3. 시기에 따른 수위품종의 교체 요인

 

조선 전체에서 대표적으로 재배되던 쌀 품종으로 시기 구분을 하면 1910년대는 조신력, 1920-30년대 중반의 곡량도,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은방주로 나누어 볼 수 있 다.*17) 조선 총독부의 <농업통계표>(1940)의 우량품종별 재배면적의 추이 자료를 기준으로 봤을 때, 재배면적에 있어서 1910년대에는 조신력이 1위를 차지하다가 1920년 대에는 곡량도가 1위가 된다. 곡량도는 1920년대 재배면적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1930년 46만 정보로 최고점에 이르지만 이후 은방주가 1위 면적을 차지한다. 참고로 북한 지방도 1910년대의 일출, 1920년대 구미, 1930년대에는 구미에서 다시 육우(陸 羽)132호로의 교체를 확인할 수 있다.*18)

 

우량품종의 교체는 수위품종*19)의 특성으로 방향성을 대체로 파악할 수 있다. 전북의 사례를 보면, 초기에는 재래품종에 비해 많은 양의 수확이 가능한 조신력이 수위품종 이지만, 비료가 증대가 도열병을 불러오면서 도열병에 약한 조신력은 사라지고 불량 환경에서도 재배하기 쉽고 품질이 강했던 곡량도가 20년대까지 수위품종의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비료사용이 더 증대되면서 곡량도 또한 내비성과 내병성이 약하고 비와 바람에 쉽게 쓰러진다는 단점 등으로 인해 물러난다. 이후 30년대에 들어서는 은방주가 내병성‧내비성*20)을 고루 갖추었으며, 중소립종이기에 쌀 시장의 선호와 맞아서 쌀의 품질 자체는 떨어짐에도 인기를 끌었다.

 

즉 주력 우량품종의 교체 방향을 보면 내병성과 내비성을 강화하고, 쌀의 품질보다는 생산되는 수량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성숙기가 빠른 품종으로 교체되어왔다. 물론 그럼에도 일정한 양질성, 안정성의 범위 안에는 있는 상태에서 그러한 변화가 일어난다. 전체적으로 보면, 주력 우량품종의 교체는 재배 기술과 일본 쌀 시장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21)


주)

10) 소순열, 「식민지기 전북에서의 수도품종의 변천」, 농업생명과학연구23, 전북대학교 농업과학기술연구소, 1992, 128-130면.

11) 홍금수, 위의 글, 75면.

12) 김도형(1995), 위의 글, 180면.

13) 소순열, 위의 글,127면.

14) 김도형(1995), 위의 글, 180-181면.

15) 재배면적이 가장 큰 품종을 의미함.

16) 소순열, 「식민지기 전북에서의 수도품종의 변천」, 농업생명과학연구23, 전북대학교 농업과학기술연구소, 1992, 121-123면.

17) 소순열, 「식민지기 전북에서의 수도품종의 변천」, 농업생명과학연구23, 전북대학교 농업과학기술연구소, 1992, 123면.

18) 우대형, 「일제하 미곡생산성의 추이에 관한 재검토」, 經濟史學58, 경제사학회, 2015, 67면.

19) 가장 많은 재배면적을 차지하던 품종.

20) 작물이 비료가 끼치는 해를 견디어 내는 성질.

21) 소순열, 「식민지기 전북에서의 수도품종의 변천」, 농업생명과학연구23, 전북대학교 농업과학기술연구소, 1992, 130-1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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